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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2024년 8월 스파르타시스트 69 / 영어판 기사의 2부과결론에 대한 번역이다.
2부: 중국은 자본주의가 아니다
1) 맑스주의와 국가
중국이 자본주의인가 혹은 노동자국가로 남아 있는가를 토론함에 있어서, 기본적인 방법론적 접근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국주의에 관한 문제와 마찬가지로, 좌익의 대부분이 질문이 시작되는 곳에서 그 질문을 끝낸다. “중국이 자본주의”라는 진영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단순히 억만장자와 다국적 기업들의 숫자를 지적하는 것으로 끝낸다. 반대의 관점에서는, 전략적 산업들에 대한 국가통제와 높은 경제성장률이 중국이 자본주의가 아님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고 여긴다. 다시 한번, 그것의 구체적인 역사적 발전이 아니라 개별적 단면들을 바라보는 것으로는 문제를 이해할 수 없다.
자본가들의 증가와 높은 수준의 국유화된 산업들 모두가 중국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 중요한 열쇠들이지만, 그것들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다. “소비에트 국가의 계급적 성질” (1933년 10월) 에서 트로츠키가 지적했듯이, 볼셰비키들은 러시아혁명의 첫 1년 동안에는 산업을 국유화하지 않았고, 산업은 노동자통제 하에서 사적소유들로 남아 있었다. 1921년에, 볼셰비키들은 신경제정책을 통하여 농경에서 시장관계들을 재도입했지만, 아직은 이것이 자본주의로의 복귀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에 더하여, 자본가계급은 특정한 위기들에 (예를 들면, 1970년대 포르투갈) 대응하여 산업의 거대한 부분을 스스로 국유화할 수 있다. 이러한 예들은 하나의 고립된 요소로서 취해진 소유형태들은 한 나라의 계급적 성질을 결정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음을 보여줄 뿐이다.
맑스주의자들에게는, 문제의 핵심이 국가 그 자체, 즉 무장력들과 관료집단이다. 어떤 계급독재를 그들이 방어하는가? 하나의 국가가 취할 수 있는 정치적 형태들에서의 가능한 커다란 차이들에도 (민주주의, 보나파르트주의, 파시즘 등) 불구하고, 국가는 항상 하나의 특정한 계급의 지배를 의미한다. 엥겔스를 요약하면서 레닌은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국가는 계급적대들의 화해불가능성의 산물이면서 발현이다. 계급적대들이 객관적으로 화해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한 곳에서, 그러한 때에, 그리고 그러한 한에 있어서 국가가 나타난다. 그리고, 역으로, 국가의 존재는 계급적대들이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소부르주아지 민주당원들”들은 “국가는 자신의 대립물 (자신에 반대되는 계급)과 화해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한 특정 계급의 지배기관이다”라는 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레닌은 주장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도 그렇다. 중국의 계급적 성질과 중화인민공화국(PRC)의 미래 전망들에 관한 모든 실수는 레닌이 윤곽을 잡았던 국가에 대한 이들 기본적인 개념들에 대한 거부에 기초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수정주의는 중국공산당 자신과 함께 출발한다. 민족주의 부르주아지 계급을 포함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중국의 “모든 혁명적 계급들의 연합독재”는 “신민주주의에 대하여” (1940년)에서 윤곽이 잡혔던 모택동 자신의 개념이다. 이것은 완전한 환상인 것으로 증명이 될 것이었다. 모택동의 인민해방군(PLA)이 국민당의 민족주의 세력들을 패배시켰을 때에는 “연합독재”는 없었다. 부르주아지 계급은 압도적으로 대만으로 도망을 갔고, 그렇지 않았던 자들은 몰수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 하나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 는 자신의 대립물과 화해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했고, 이것은 맑스주의 이론의 명백한 확인이었다. 하지만, 등소평의 “개혁과 개방”의 뒤에 이 똑같은 환상이 있었고, 아직까지 중국공산당은 이것을 고수하고 있다. 등소평으로부터 시진핑에 이르기까지, “중국적 특색들을 가진 사회주의”는 부르주아지 계급과 사회주의 사이에는 아무런 근본적인 충돌이 없다는 환상들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한 환상들은 중화인민공화국에 치명적인 위협이다.
다른 방식으로, 중국이 자본주의라고 주장하는 다양한 사회주의자들이 똑같은 실수를 저지른다. 중국공산당이 그렇게 하듯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양립할 수 있음을 단정하는 대신, 이들은 1949년 이후의 노동자국가로부터 1990년대에 자본주의 국가로의 점진적이고 매끄러운 이행이 중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이러한 이행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구조가 파탄나고 새로운 국가로 대체되는 격렬한 위기의 시대가 없이 벌어졌다. 즉, 그들은 똑같은 국가기구가, 똑같은 관료집단이, 그리고 똑같은 정권이 두 개의 적대적인 계급들의 독재를 방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국가의 존재 바로 그것이 체현하는 화해불가능한 계급적대를 지워버리는 또 다른 방식에 불과하다. 1930년대 소련과 관련하여 정확하게 이러한 주장들에 답하면서, 트로츠키는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한 계급의 수중에서 다른 계급의 수중으로의 권력의 이동이라는 대격변적 성격과 관련된 맑스주의 명제는 역사가 미친듯이 앞으로 쓸어가는 혁명적 시기들에 뿐만 아니라, 사회가 뒤로 굴러가는 반혁명의 시기들에도 적용된다. 소비에트 정부가 프롤레타리아트적인 것으로부터 부르주아지적인 것으로 점진적으로 변해왔다고 주장하는 자는, 말하자면, 개량주의의 필름을 거꾸로 돌리고 있고 있는 것이다.”
비록 시장관계들이나 계획경제가 지배적인 정도가 분명히 중요한 요소들이기는 하지만, 중국의 계급적 성격을 확립하기 위하여 핵심적인 기준은 이러한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국가기구의 본성과 기능에서의 질적인 변화가 있어왔는지 여부이다. 중국이 자본주의라고 믿는 자들은 트로츠키가 틀렸고 정말이지 하나의 국가가 점진적으로 그 계급적 본성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중국에서 반혁명이 벌어졌는지를 설명해야만 한다.
2) 동유럽과 소련에서의 반혁명
1930년대 트로츠키의 이론적 주장과 오늘날 사이의 핵심적인 차이는 우리가 일련의 명백한 반혁명들의 역사적 예들을 보아왔다는 것이다. 유럽의 구 노동자국가들과 소련에서 자본주의가 복구되었다는 사실을 둘러싸고는 거의 어떠한 논란도 없다. 폴란드, DDR(동독), 유고슬라비아, 그리고 소련 그 자신에서 과정은 달랐으나, 이들 예들의 각각의 것이 “한 계급의 수중에서 다른 계급의 수중으로의 권력의 이동이라는 대격변적 성격”이 사실임을 완전하게 보여준다.
각각의 사례에서 어떻게 반혁명이 승리했는지에 관한 자세한 역사로 들어가지 않고도 모든 사례들에 공통적인 몇 가지 핵심적인 특징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 각각의 사례에서, 첨예한 정치적 위기가 스탈린주의 정권의 붕괴로 귀결되었다. 비록 어떤 국가들에서는 과거의 스탈린주의자들이 자본주의 하에서 저명한 심지어 지도적인 지위들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어떤 사례에서도 과거의 공산당이 권력에 남아 있지는 않았다. 게다가, 모든 사례들에서, 국가구조가 완전하게 재조직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그리고 소련에서, 국가들은 분열되거나 청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그 사례가 아니었던 곳에서도 국가는 자신의 무장력을 재조직했고, 이름, 헌법, 그리고 법률체제를 바꾸었다.
유럽에는 적군이나 인민군대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국기들에는 더 이상 망치와 낫이 없고(트랜스니스트리아를 제외하고는), 사회주의 공화국들과 인민공화국들이 없다. 혹자는 그런 이름들과 상징들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틀렸다. 정복군으로서 자본주의는 자신의 깃발, 자신의 상징들, 자신의 가치들과 언어를 가져왔다. 이 변화들은 국가권력에서의 결정적인 단절을 표현했다. 이것들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결정적인 승리를 대변했다.
문제의 경제적 측면을 살펴보자. 반혁명으로 귀결되기까지, 동부 블록에 있는 많은 나라들이 수년에 걸쳐 자신들의 경제들을 자유화하는 방책들을 취해왔다. 하지만, 자본주의로의 복귀는 점진적인 경제적 이행이 아니라 재앙적인 충격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과거의 경제적 모델들이 갑자기 붕괴되었고, 일반적으로 IMF의 명령하에서 새로운 모델이 도입되었다. 즉각적인 결과들은 탈산업화, 대량실업, 물가인상과 불경기였다.
“계획경제로부터 시장경제로의 이행 동안 소득, 불평등, 그리고 빈곤”이라는 1998년의 한 세계은행 연구에 따르면, 자본주의로 이행한 나라들에서 생산된 재화와 용역의 총가치가 실질적으로 적어도 4분의 1만큼 줄었다. 대부분의 경우, 국가소유 기업들이 똥값으로 청산되었다. 벨라루스는 그 법칙을 증명하는 예외적인 경우이다. 국가기업들이 청산되지는 않았어도, 일인당 GDP가 34% 축소되는 등 경제적 충격은 마찬가지로 잔혹했다.
자본주의 복구의 사회적 결과들은 극적이었다. 기대 수명이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줄어들었다. 러시아는 사망률이 모든 산업화된 나라가 평화시기에 경험했던 것을 넘어서 올라갔다. 유고슬라비아는 내전 속에 해체되었다. 구 공산주의 국가들 전역에서 빈곤이 폭발했다. (전쟁 중에 있던 나라들을 제외한) 이들 나라들에 대한 세계은행 연구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1989년에는 (국제적 가격들에서) 하루에 4달러 아래로 살아가는 인민들의 숫자가 (약 3억 6천만 명의 인구들 중에서) 1400만 명으로 추산되었던 반면, 이제는 1억 4천만 명이 똑같은 빈곤선 아래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결론들은 분명하다: 모든 곳에서 반혁명은 잔혹한 과정이었다. 그것이 정치적, 경제적, 혹은 사회적 수준에서 이건 아니건, 노동자국가로부터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갑작스러웠고 과거와의 분명한 단절을 의미했다.
3) 중국에서의 개혁과 개방
동유럽과 소련에서의 반혁명들이 중국에서 “개혁과 개방”과 어떻게 비교되는가? 사유화의 숫자와 시장관계들의 확산과 같은 고립된 요인들에만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비슷한 점들을 가리킬 수는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뒤로 물러나 큰 그림을 살펴본다면, 두 가지는 어떠한 공통점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아주 명백하다.
정치적 차원에서, 그 차이점들이 가장 명백하다. 중국은 80년대 후반 유럽과 중앙아시아에 있는 비자본주의 나라들을 뒤흔들었던 정치적 격동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격변의 결과는 정확하게 반대였다. 1989년 천안문 항의들이 촉발했던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봉기가 CPC 정권을 위기 속으로 내 던졌다. 그러나 동독, 폴란드, 그리고 소련에 있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들과는 달리, 중국공산당은 붕괴하지 않고 유혈탄압의 파도 속에 그 운동을 분쇄했다. 그 결과, 중국공산당은 정치권력에 대한 자신의 장악력을 강화했다. 천안문 사태들의 결과는 정치적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었다.
오늘, 모든 핵심적인 국가기구들이 그들의 기능과 외양에서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은 채로 있다. 공산당이 여전히 중국을 지배한다. 무장력들은 모택동의 농민군에 대한 자신의 연속성 취하는 인민해방군으로 남아 있다. 인민공화국은 여전히 건재하고, 최고의 국가기관은 여전히 (공식적으로) 전국인민대회이며, 가장 명망있는 지위는 공산당 총서기로 남아 있다. 누구도 이 사실들에 대하여 반박하지 않는다 – 이 사실들은 중국이 자본주의라고 생각하는 자들에 의하여 그냥 무관한 것으로 여겨진다.
경제와 사회적 영역들은 어떠한가? 트로츠키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붕괴로 귀결되는 소련에서의 계속적인 관료적 지배는“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성장의 정체로, 끔찍한 사회적 위기로, 그리고 전체 사회의 수직 추락”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소비에트 국가의 계급적 성격”) 어떻게 이것이 정확하게 동유럽과 소련에서 벌어졌던 것임을 우리는 이미 보아왔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에서는 완전히 반대의 것을 본다. 1990년에는 역사상 가장 놀라운 생산력들의 발전, 전례가 없는 빈곤축소, 그리고 사회경제적 지표들에서의 일반적인 개선이 있었다.
이것이 중국에서의 시장 자유화가 노동계급의 이해에 따라서 이루어졌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자본주의 기업들과 외국 벤쳐들에서의 진저리나는 노동조건들에 더하여, 노동계급의 거대한 층들이 사유화들과 시장개혁들 때문에 지독하게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명백하게 중국경제는 반혁명이 있었던 나라들에서 경험했던 것과 같은 파괴적 충격을 겪지 않았다. 개혁의 과정은 극적인 결과를 낳았지만, 그것은 점진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인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사실, “개혁과 개방”의 전체 포인트는 자본주의를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스탈린주의 정권들의 운명을 피하기 위한 중국공산당의 경제적 조건들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관료집단 그 자신이 어떻게 이 변형을 대변했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복구의 전환점으로 여기는 1992년 남방시찰 동안의 등소평을 인용할 만하다:
“경제특구들을 건설하는 것에 관해서, 일부 사람들은 그것이 자본주의의 도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여부를 의심하면서 바로 시작 때부터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심천 건설에서의 성취들은 이 사람들에게 명확한 답을 제공해왔다: 경제특구들은 사회주의이지 자본주의가 아니다. 심천의 사례에서, 공공소유 부문은 경제의 대들보인 반면, 외국 투자 부문은 4분의 1만을 차지한다…. 이것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있는 한, 걱정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이점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대형과 중간 크기의 국가소유 기업들과 지방기업들을 가지고 있다. 더 중요하게는, 정치권력이 우리의 수중에 있다.”
요점은 등소평이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헌신에 대하여 진실인 정도가 아니다. 그렇기 보다는, 이들 단어들은 그것들이 연속성을 위한 명백한 열망을 보여주기 때문에 유의미하다. 이것들은 새로운 사회적 정권을 건설하는 것에 대하여 단호했던 보리스 옐친의 단어들이 아니라, (부하린이나 고르바쵸프 같은) 우익 스탈린주의 개혁가의 단어들이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불평등들은 어떤가? 그것들이 러시아와 다른 구 노동자국가들에서 처럼 폭발했는가? 불평등들은 정말이지 가공할 정도이고, 이것은 중국공산당 정책들의 반동적 성격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이 새로운 것이 거의 아니라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모택동 하에서 굶주렸던 수백만의 인민들을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 다시 한번, 단순히 통계들 보다 더 깊이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러시아에서는, 불평등들이 폭발했고, 억만장자들이 총체적인 사회적 쇠퇴라는 상황 속에서 등장했다. 중국에서는, 이 과정이 전반적인 사회적 진보라는 상황 속에서 벌어졌다. 첫 번째 경우에는 외국자본과 소수 상류층들에 의하여 약탈당하고 있는 썩어가는 사회가 있다. 나머지 경우에는, 급속하게 발전하는 사회에서 불균형적인 몫을 챙기는 자본가들과 관료들이 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지니 계수가 올라가지만, 이것이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적 과정들을 통하여 발생한다 – 한쪽에서는 반혁명, 다른 한쪽에서는 외국자본의 경제에 대한 국가통제와의 융합에 기초한 고도성장.
4) 개량주의의 필름을 뒤로 돌리기
중국 국가와 정권이 본질적으로 온전하게 남아 있어 왔다는 명백한 사실에 직면하여, 중국이 자본주의라는 것에 대한 다양한 지지자들은 이 문제를 무시하거나 이론적으로 이것을 둘러대야만 한다. 적어도 그 문제를 풀기 위하여 시도하는 두 가지 예들을 살펴보자.
투사경향의 전통
투사경향은 의회 다수를 장악한 사회주의자들이 평화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의 통제력을 장악함으로써 사회주의가 성취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중국이 자본주의라는 관점의 가장 시끄러운 지지자들 중에 이 경향의 다양한 파생조직들이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테드 그란트의 이론들에 스스로를 기초하고 있는 노동자 인터내셔널 위원회(CWI)는 동유럽에서 스탈린주의의 붕괴 이전까지 자신의 개량주의 강령을 기형화된 노동자국가들로 확장했다. CWI 국제집행위원회의 1992년 문서는 이 기간에는 “노동자국가로부터 유래한 경제적 기초에 의존하는 반혁명적 정부들이 자본주의를 수립하는 것으로 움직이는 기이한 국가들”의 등장이 있었으며, “그러한 조건들 하에서는 하나의 고정된 사회적 범주 즉 자본주의 국가 혹은 노동자국가를 적용하는 것이 항상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유지했다 (“스탈린주의의 붕괴”). 레닌의 “계급적대들의 화해불가능성”은 사라지고, 구멍투성이의 “하이브리드 국가들”이 들어온다.
이 수정주의적 이론의 구체적인 결과는CWI가 소련을 파멸시키기 위하여 옐친이 세웠던 바리케이드들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던 것이었다. 반혁명이 불가피했음을 부정했지만, 그들은 결국 하나의 반혁명에 참여했다. 결국, 러시아가 1991년 이전에 더 이상 노동자국가가 아니었다면, 방어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련 파괴의 재앙적 결과는 이 관점의 완전한 파산과 이 관점이 대변했던 역사적 배신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실패로부터 배우기는커녕, CWI와 그 파생조직들은 똑같은 방법론을 오늘날의 중국으로 확장해왔다. 팜플렛 중국은 자본주의인가? (2000년 5월)에서, ISA의 로렌스 코트스는 중국이 점진적으로 자본주의를 향하여 이행했다고 주장하기 위하여 “하이브리드 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중국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1-92년까지 하이브리드였다. 하나의 체제로부터 다른 것으로의 이행은 완성되지 않았었다 – 이것은 두 개의 길들 혹은 전망들이 가능했던 기간이었다. 이것은 더 이상 그 경우가 아니다. 주요한 요소는 소련의 붕괴와 국제화의 재촉이라는 국제적 사건들이었지만, 결정적인 전환점은 천안문에서의 운동에 대한 분쇄와 이것이 의식성에 미친 영향이었다.”
우리가 이미 보아왔던 것처럼, 천안문의 결과는 단절이 아니라 정치적 연속성이었다. 국제적 상황은 어떤가 하면, 이것이 최고의 중요성을 띄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 벌어졌던 어떤 것 때문에 국가의 성격이 변하지는 않는다. 러시아 내전의 운명은 국제적 사건들에 의하여 많은 부분 결정되었지만, 국가의 성격은 볼셰비키들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변했었다. 코트스에 의하여 지워졌던 그렇게도 결정적인 전환점들이 정확하게 이것이다. 국가가 화해불가능한 계급적 이해관계라는 근거 대신에, 우리는 정권과 국가구조 전체가 온전한 채, 그리고 계급 이해관계들의 결정적인 충돌이 없이 하나의 단계로부터 또 다른 단계로 점진적으로 지나갈 수 있는 일련의 국가 형태들을 알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중국에 적용된 투사의 낡은 의회 개량주의이다.
RCIT
다른 정치적 전통을 가진 RCIT는 적어도 정치권력의 문제에 대한 약간의 고려는 한다. 그들에 따르면, “스탈린주의 관료적 노동자정부가 말과 행동 모두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재수립할 것을 굳게 결의한 부르주아지 복구주의 정부에 의하여 대체되거나 스스로를 그 정부로 변형시킬 때” 자본주의 반혁명이 발생한다. (쿠바의 혁명은 배신당했는가?, 2013년).
우리는 시진핑과 등소평 모두가 자본주의를 복구하는 것에서 결단코 얼마나 “굳게 결의”되지 않았는지를 보아왔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스탈린주의 관료적 노동자정부”가 스스로를 “부르주아지 복구주의 정부”로 변형시킬 수 있다고 RCIT가 주장한다는 점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RCIT에게는, 기형화된 노동자국가들에 있는 국가탄압의 기구들이 궁극적으로는 이미 부르주아지적인 것이라고 그들이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트로츠키가 명시적으로 그것을 공식화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저작들로부터 보면,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대한 노동계급 혁명이 프롤레타리아트 소유관계들을 타도하는 있을 수도 있는 자본주의 복구보다 훨씬 더 격렬할 것임을 예측했음이 명백하다. 그 이유는 ‘부르주아지-관료’ 국가 기제 (즉, 경찰, 상비군, 관료집단)은 프롤레타리아트적 기구가 아니고, 노동계급보다는 부르주아지 계급에 훨씬 더 가까운 소부르주아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기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강조]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소부르주아지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은 맞지만, 그들이 지휘하는 국가 기제가 “프롤레타리아적 기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틀렸다. 이 수정주의적 관점은 노동자국가의 정의 바로 그것을 거부하는 것에 이른다.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은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모든 위대한 혁명적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엥겔스는 뿌리가 깊을 뿐만 아니라 말하자면 석화된 편견들에 의하여 텅 비어 있는 만연한 속물근성이 고려하는 것은 주의할 가치가 가장 적으며, 가장 습관적인 것이라는 점으로 계급의식적 노동자들의 주의를 끌려고 시도한다. 상비군과 경찰이 국가권력의 으뜸가는 기구들이다.” [우리의 강조]
노예제적, 봉건적 혹은 자본가의 독재 등의 모든 다른 계급 독재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국가권력의 으뜸가는 기구들”은 “상비군과 경찰”이다. 관료적으로 기형화된 노동자국가에서는, 이들 “무장한 자들의 기관들”이 관료집단에 의하여 노동계급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반하여 힘을 행사하지만, 그것들은 노동자국가의 기관으로 남아 있다.
중국에서는, 인민해방군이 내전의 시기 이래 좌익적 반대를 진압하기 위하여 사용되어 왔는데, 1989년에 한가지가 생생하게 목격되었다. 하지만, 인민해방군은 중국 자본가국가를 파괴했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립했다. 인민해방군이 소부르주아지 기관으로 남아 있었는가? 중국은 소부르주아지 국가였는가? 그렇지 않다. 1949년 이래, 인민해방군은 안팎의 반혁명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의 핵심 기관이었다. 대만의 중국 부르주아지 계급이 결코 본토로 넘어올 수 없었던 것은 인민해방군 때문이다.
트로츠키가 설명했듯이, 기형화된 노동자국가에서 관료집단과 국가 사이의 관계는 친자본주의적 관료들과 노동조합 사이의 관계와 유사하다. 비록 관료들이 평조합원들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하여 노동조합 기제를 이용할 수 있고, “노동계급 보다는 부르주아지 계급에 더 가깝다”고 해도, 노동조합 그 자체는 그 존재 바로 그것이 사업주들에 맞서는 성벽이라는 노동계급의 기구로 남는다. 노동조합 관료가 자본가들의 모순적이지 않은 대변자가 완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그는 노동조합을 떠나야만 한다. 똑같은 방식으로, 스탈린주의 정부는 혁명의 국가기관들과의 고리를 끊지 않고는 “자본가 정부”가 될 수 없다.
1991년 소련에서 끊어졌던 것이 정확하게 바로 이 고리이다. 옐친은 노동자국가를 파괴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관료집단의 권력의 원천을, 그리고 지배계층으로서의 관료집단 자체를 파괴했다. 중국에서는, 관료집단이 의식적으로 이런 길을 피해왔고 국가 탄압의 기구들에 대한 굳건한 통제력을 유지함으로써 단결된 집단으로서 스스로를 유지해왔다. RCIT의 국가에 관한 “이론”의 전체 요점은 두 가지 사례들 사이의 질적 차이를 지우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경찰과 군대가 항상 기껏해야 소부르주아지 계급의 기관들이기 때문에,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손상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가운데, 하나의 계급독재로부터 다른 것으로 매끄럽게 지나가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은 국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거부일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레닌주의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그들의 이론을 따라서, RCIT는 중국과 베트남이 자본주의라고 선언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쿠바와 북한도 같은 것이라고 선언한다! 반혁명의 필요성을 지워버림으로써, 그들은 아무데서나, 심지어 경제와 정권이 명백하게 전형적인 스탈린주의 모델들에 기초해 있는 나라들에서 조차, 자본주의를 찾아낸다.
5) 누가 중국을 지배하는가?
국가에 관한 기본적인 맑스주의 원칙들의 재언명이 우리의 비평가들을 설득할 수 없을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 이론적 지점들은 사실들에 모순된다고 그들은 답할 것이다. 실제로, 중국은 814명의 억만장자들과 세상에서 가장 큰 자본가 기업들 중 많은 수를 보유하고 있으며, 심지어 중국의 국가소유 기업들(SOEs)은 시장원칙들에 따라서 운영되고 있다.
이것들은 분명히 중요한 사실들이지만,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발전을 안내하는 역사법칙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 속에 그것들이 위치해 있어야만 한다. 인류는 비행의 과학을 숙달했다지만, 이것이 중력의 법칙에 위배되지는 않는다. 사실, 중력의 법칙을 이해함으로써만, 어떻게 비행기가 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중국은 자본가들이 있는 기형화된 노동자국가이다. 이것은 매우 모순적인 발전이지만, 이것이 국가에 대한 맑스주의 이론에 위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맑스주의 이론을 가지고서만 오직, 우리는 경험적 증거를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누가 진짜 중국을 지배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적절하게 답할 수 있다.
중국의 계급적 성격의 점진적 변화를 제기하는 이론들이 가지는 가치를 이미 보아왔다. 그러나 중국이 자본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론적 문제에는 덜 집중하고 경험적 사실들에 대한 인상주의적 해석에 더 집중한다. 예를 들면, 중국공산당 사회주의를 방어하는 두 사람에 대한 최근의 논박에서, RCI는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비록 국가가 서구의 경쟁자들의 경제에서보다 더 영향력 있는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경제를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명백하다. 그러나 여기서 요점은 은행들이 ‘사적 주식소유주들 보다는 정부에 우선적으로 책임을 진다’고 해도, 은행들과 정부 둘 다 시장의 필요라는 명령들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것이다. 시장은 ‘사회주의를 위해 복무’하지 않는다.”
다니엘 몰리, “’동쪽은 여전히 붉은가?’ 중국이 자본주의임을 부정하는 자들에 답하며” (6월 7일)
이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RCI는2008년 대규모 금융위기(GFC)에 뒤이어 중국공산당이 취했던 경제방책들은 중국경제에서의 장기적 불균형들을 키웠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주장이 중국공산당의 정책들이 잘못 인도되었음을 보여주지만, 이것이 중국공산당이 시장에 의하여 지배받고 있음을, 그리고 중국공산당이 RCI의 말대로 “경제와 그 자신의 국가소유 기업들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왔음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사실은, 2008년은 아주 정반대를 증명한다. 정당(2012년)에서 리차드 맥그레고르는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당의 힘은 2008년 후반과 2009년 초에 보여졌다…. 중앙은행, 은행규제 당국, 그리고 심지어 은행 그 자신들이 모두 그 위기에 대한 대응을 마련함에 있어서 주의를 하라고 충고했다. 이들 삼자 모두가 지난 10여 년 동안 신뢰할 수 있는 상업은행 체제를 건설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해왔었다. 하지만, 가파른 둔화의 나락을 응시하던 정치국은 돈 펌프가 작동하게 하라는 위로부터의 포고를 발표했다. 일단 이렇게 된 이상, 은행들은 스타팅 블럭들로부터 달리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2007년 최고 3분의 1이었을 때와 비교해서, [대출들의] 15%만이 가구 소비자들과 사적 사업들에게 갔다. 대부분이 국가 기업들에게로 갔다.”
이 시기 정부들이 은행들을 대체적으로 통제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들이 은행들로 하여금 돈을 대출하도록 강제할 수 없었던 서구에 있는 은행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중국에 있는 은행들이 행동했다고 저자는 설명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근본적으로, 2008의 금융위기는 두 개의 사회적 정권들이 다르게 반응했음을 보여주었다. 시장이 지배하던 자본주의 서구에서는, 붕괴로부터 금융체제를 지키고 수익성과 안정을 보장하기 위하여 국가가 개입했다. 중국공산당이 경제를 통제했던 중국에서는, 국가가 정권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개입했다. 그 과정에서, 국가는 은행들이 수립하기 위하여 십수 년을 보냈던 수익성이라는 원칙들에 대하여 반대로 행동했다.
RCI는 이것을 다루지 않는다. 그들은 2008년에 뒤이은 투기 거품의 존재를 관찰하고는 중국이 자본주의이고, 중국공산당은 “통제력을 상실” 해왔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다시 한번, 문제를 자세히 들여다 보자. 중국공산당은 이 투기 거품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왔는가? 2020년에, 중국공산당은 “3개의 레드라인들”이라는 규제를 도입했는데, 이 규제는 주택 거품을 터뜨리는 것을 특별히 겨냥했다. 이것은 부동산 재벌 헝다(恒大)가 파산하고 부문 전체가 침체로 돌입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중국공산당의 행위들의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결과들은 파괴적이었는데, 자신들이 갚아 나갈 아파트들을 결코 가질 수 없을 중국 시민들에게 특히 그랬다. 이 사례는 중국공산당이 전형적인 스탈린주의적 방식으로 한쪽 극단에서 다른 쪽 극단으로 갈지자 행보를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이 중국공산당이 시장 앞에서 무력함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한번 더, 이들 행위들은 중국공산당과 미국정부 사이의 차이를 보여준다. 전자의 경우, 정치적 불안정성으로 귀결될 수도 있을 첨예한 위기를 피하기 위하여 국가가 스스로 투기 거품을 터뜨렸다. 미국의 사례에서는, 정부는 주택거품이 가능한 길게 가도록 유지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고, 현재는 정부가 주식시장에 대하여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가 사실들이다. 그러나 각각의 국가가 근본적으로 다른 법칙들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고는, 그것들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중국경제를 이해함에 있어서 어려운 부분은 외국 투자를 끌어들이고 자기 자신의 노동력에 대한 규율을 세우려고 중국경제에 시장경제라는 외양을 부여하기 위하여 중국공산당이 수십 년 동안 열심해 일해 왔다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국가소유 기업들을 부분적으로 사유화했고, 사유화된 기업들에 “독립적인” 이사회들을 부여했으며, 사적 자본가들이 수억 달러짜리 기업들을 건설하도록 하는 등의 일을 했다. 그러나 이런 자유화의 뒤에서, 중국공산당은 공기업들과 사기업들 모두에 대하여 강력한 통제력을 유지했다. 여기에 비추어 볼 때, 문제의 핵심은 기업이 공식적으로 사기업인지 공기업인지 여부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모든 기업들이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필요요건들에 부합되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이 정치적 통제는 중앙조직부(COD)와 같은 기구들에 의하여 보장되는데, 중앙조직부는 나라에 있는 사실상 모든 중요한 자리를 직접 임명한다. 맥그래고르는 (이런 일이 미국에서 벌어진다면 있을 수 있는) 가정적 비교를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미국에 있는 비슷한 부서가 미국 전체 내각, 주지사들과 부주지사들, 주요 도시들의 시장들, 모든 연방 규제기관들의 수장들, GE, 액손 모빌, 월마트 그리고 나머지 약 50대 기업들의 최고경영자들, 대법원의 재판관들, 뉴욕타임즈, 월스트리트 저널, 그리고 워싱턴 포스트 들의 편집자들, TV 네트워크들과 케이블 방송국들의 수장들, 예일과 하바드 그리고 다른 큰 대학들의 총장들, 그리고 브루킹스 연구소와 헤리티지 재단과 같은 씽크탱크의 수장들에 대한 지명을 감독한다.”
중국공산당에 의한 통제는 이윤이라는 동기에 따르지 않는다. 사실은, 중국공산당의 통제는 이윤이라는 동기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들과 직접적으로 충돌한다. 예를 들면, 2004년에 COD는 경고도 없이 중국의 3대 텔레콤 기업들에 있는 고위경영자들에 대하여 서로 다른 회사로의 이동을 결정했는데, 이들 기업들은 서로 경쟁하고 있었고 서구 주식시장의 원칙들을 따르게 되어 있었다. 경쟁하는 회사들의 최고경영자들을 순환시키는 것은 자본주의적 경쟁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들을 위반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미국 정부가 저커버그가 테슬라를, 그리고 머스크가 메타를 책임지게 결정하는 것과 같다. 중국공산당은 가격전쟁들을 억제하고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이런 술책을 부렸다. 어떤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이것이 진정 시장이 국가에 명령하는 조건들인가?
중국에서 자본주의 관계들의 만연을 보여주기 위하여 만들어질 수 있는 모든 통계들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사실은 자본가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이 지휘한다. 중국에서의 자본주의적 관계들의 거대한 성장은 중국공산당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자본가들과 연합하여 행동해 온 결과이다. 하지만 이것이 중국공산당의 이해관계가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와 같다거나 중국공산당의 정책들이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에 의하여 주로 안내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진실은 이렇다. 중국공산당 관료집단은 (외국과 국내) 자본의 압력들과 노동계급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는 조정자의 지위를 계속해서 차지하고 있다. 그러한 관계로, 관료집단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들 양쪽 세력들에 대하여 국가기구를 휘둘러야만 한다.
6) 보나파르티즘
중국공산당이 중국에 있는 자본가들에게 가하는 강제가 무엇이건, 이것은 다른 어떤 보나파르트 정권과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 표준적인 주장이다. 2017년에, 사우디 아라비아의 황태자 모하마드 빈 살만(MBS)이 수백 명의 사우디 자본가들 (대개는 친척들)을 물러나게 하고 그들로부터 수십억 달러를 압류했다. 2003년에,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당시 러시아 최고의 부자였던 그의 경쟁자 미하일 코도르코프스키를 사기와 횡령을 이유로 시베리아에 있는 감옥에 보냈다. 이것들이 정규적으로 자본가들을 숙청하는, 혹은 위에서 들었던 몇 가지 예들의 중국공산당과 어떻게 다른가? 이것들이 어떻게 다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각각의 정권과 정권의 국내 자본가계급과의 관계에 관하여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사우디 아라비아는 중동에서 반동의 기지로서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하여 2차 세계대전 이래로 미국과의 군사동맹에 의존해 온 절대왕정이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는 왕족이 기본적으로 자본가계급이기도 하다. 2017년의 유명한 사건은 중세를 현대로 옮겨 놓은 것이라 할만한 왕조 내부의 불화였다. MBS가 자기 자신의 가족을 강탈했던 목적은 원칙적으로 왕조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함이었는데, 이것은 사우디 아라비아 자본가계급의 봉건적 성격으로부터 도출되는 “정상적인” 기능이다. 러시아에서는, 조폭 소수 지배집단 사이의 난장판의 폭력적 불화라는 상황에서 푸틴이 권력에 올랐다. 그의 정부의 보나파르트적 성격은 반혁명 이후 러시아에서 긴장을 억제할 수 있는 조정자의 필요성을 반영했다. 푸틴이 전열에서 이탈한 소수지배집단들의 특정 개별인자들에 대하여 자신의 권위를 과시해야만 했던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다.
두 경우 모두에서, 보나파르트적 탄압의 방책들은 자본주의 정권들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에 복무했다. 중국에서는, 정권의 보나파르트적 성격이 매우 다르다. 1949년 이후, 중국공산당의 권력은 자본가계급을 분쇄했던 노동자국가에 대한 관료적 통제력에 기초하여 세워졌다. 혁명적 국제주의 강령에 반대했던 중국공산당은 경제의 후진적 성격과 노동계급과 농민으로부터의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요구들, 그리고 세계 제국주의로부터의 적대적 압력 사이에서 스스로가 항상적으로 압착되어 있었다. 90년대에 스탈린주의가 전면적으로 붕괴하면서, 중국공산당은 자본가들과 함께 바람이 부는 곳으로 더욱 힘차게 기대는 것을 선택했다. 국제적 상황과 국내의 상황이 바뀌었지만 정권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중국공산당의 보나파르트적 성격은 여전히 근본적으로 똑같은 계급세력들로부터 나온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러시아와는 달리, 중국의 자본가계급은 정권의 기초가 아니라 경쟁자이다. 많은 자본가들이 중국공산당 당원이나 최고위층 관료들과 관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진실이다. 계급적대들은 결혼이나 직위들을 통해서 극복될 수 없는데, 이것은 프랑스의 귀족로부터 힘들게 배운 교훈이다.
그들의 정권들의 보나파르트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MBS도 푸틴도 시진핑도 그들의 권력이 의존하고 있는 사회적 이해관계를 초월할 수 없다: 사우디 왕조에게는 왕조적 이해관계, 푸틴에게는 소수 지배층의 이해관계, 그리고 시진핑에게는 관료적 이해관계. 앞의 2가지 경우에는, 지배층의 권력이 자본가계급에 의존한다. 자본가들의 근본적인 이해관계를 공격하는 것은 정권의 성격 바로 그것에 모순될 것이다. 중국공산당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충분한 외부적 내부적 압력하에서라면, 중국공산당은 자본가계급을 몰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본가계급에 대한 몰수는 엄청난 혼란을 초래하게 될 것이고, 이것은 중국공산당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초기에 자본가계급에 대한 몰수를 해왔지만, 1949년 이전의 모택동은 자본가들을 몰수 싶어하지 않았다는 점을 잊지 말도록 하자.
정권들을 향한 자본가들의 행동을 살펴봄으로써 이 세가지 정권들의 다른 계급적 기초를 더욱 볼 수 있다. MBS의 폭정에도 불구하고, 백만장자들과 억만장자들은 불꽃으로 날아드는 나방들처럼 사우디 아라비아에 모여든다. 러시아에서는,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과 서구의 경제제재들의 발생이 의미있는 수의 부유한 개인의 떠남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소수지배층은 정권을 지지하기 위하여 집결해왔다. 2022년 이래로, 억만장자들은 500억 달러의 외국에 있는 자산들을 러시아로 송금해왔다. 이것은 정권이 서구의 적의에 직면하여 의존할 수 있는 지주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우리는 정반대를 발견한다. 자본가들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떼를 지어 이민을 가려할 서구보다 정권을 더 두려워한다. 정권이 그런 이민을 엄격하게 제한함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매년 자본가들이 떠나는 나라 목록에서 꼭대기에 있다. 헨리와 파트너스 이민회사에 따르면, 중국을 떠나는 고도의 순가치를 가지는 개인들의 숫자가 팬데믹이 끝난 이래 매년 증가해왔는데, 2024년 현재까지 15200명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모택동과 시장들 (2022년)에서 크리스토퍼 마퀴스와 쿠뉘얀 퀴아오는 “중국 기업가들의 4분의 1보다 많은 수가 그들이 부자가 된 이후 나라를 떠났으며, 보고서들은 남아 있는 기업들가의 거의 절반이 나라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중국공산당이 중국에 있는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를 방어하는 것에 근본적으로 전념한다면, 왜 사실이 그러한 것인가? 다른 독재들 하에 있는 자본가들은 왜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정부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7) 재산권
중국을 자본주의로 여기는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하여 사용되는 궁극적인 주장은 관료집단이 스스로를 자본가계급으로 변형시켰다는 것이다. 배반당한 혁명(1936년)을 인용하면서, 그들은 아래와 같은 트로츠키의 주장을 의기양양하게 가리킨다:
“만약 특권들이 자신의 자식들에게로 전해지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절반의 가치만을 가진다. 그러나 유언의 권리는 재산권과 분리할 수가 없다. 기업의 관리자가 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주식소유주가 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결정적인 영역에서 관료집단의 승리는 관료집단의 새로운 소유계급으로의 변환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의 비평가들은 중국공산당 관리들과 그들의 친척들이 주식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관료집단은 스스로를 자본가계급으로 변형시켜왔다고 결론을 짓는다. 이것이 피상적 수준에서는 진실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들 재산권들의 실제 의미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중화인민공화국 수정헌법은 “시민들의 법적인 사적재산권은 불가침”이며, “국가는 법의 조항들에 따라서 사유재산을 소유하고 상속할 수 있는 시민들의 권리를 보호해주어야 할 것이다”고 언명한다. 하지만, 이것이 이 문제를 마무리하는 것은 아니다. 1936년 1월 1일 편지에서, 트로츠키는 “현실을 소위 재산의 형태들, 즉 법적 허구들”과 구별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했다. 사적소유에 대한 공식적인 존중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있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추가 검토를 한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우선, 헌법은 “국가는 사회주의 법체제의 통일성과 신성함을 보호해야 할 것”임을 또한 언명한다. 우리는 이것이 어떻게 사적소유에 대한 방어와 양립할 수 있는 지를 스탈린주의 학자들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또한 어떤 자존감을 가진 자본가라도 놀라 눈을 치뜨게 하는 것이 “사회주의적 공공재산은 신성하고 불가침이다”뿐만 아니라 도시나 시골 어디에서라도 사적 개인들의 어떠한 토지라도 소유가 불가능함과 같은 언명들이다. 만약 이것이 자본주의라면, 이것은 분명히 매우 이상한 자본주의이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충고를 따라 공식적인 법적 문구들을 넘어서 보자. 사적소유권의 기본적인 한 기준은 어떤 사람이 소유한 재산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것이 재산이 사적인 것으로 존재하는 핵심이다. 중국에 있는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자산들을 통제하는지가 문제이다. 그렇다. 그러나 오로지 그들이 중국공산당의 바램에 호응하는 방식으로 자산들을 사용한다면.
개별 자본가들이 국가소유 기업들을 포함하여 기업들의 주식을 소유는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사업들에 대한 궁극적인 통제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중국공산당이 어떻게 최상위 최고경영자들의 지명을 효과적으로 감독하는지에 대하여 이미 살펴보았다. 그러나 당의 통제는 더욱 나아간다. 문서상으로는 사적인 재산이 실제로는 사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중국공산당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수없이 많은 사례들이 있다. 예를 들면, 중국은 스톡옵션들을 가지고 국가소유 기업들의 최상위 최고경영자들에게 포상하면서 서구를 흉내 냈다. 그러나 이들 최고경영자들이 이들 주식들을 팔려고 결정할 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도록 되어 있음을 이해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 열대우림의 작은 한 조각을 소유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회사를 소유했다 –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격증을 벽에 걸어둘 수 있고, 거기까지이다.
물론 가장 유명한 사례가 소유주 잭 마가 당을 비난한 이후 중국공산당이 앤트 그룹의 주식공모를 중단시킨 것이다. 앤트의 모기업은 수십억 달러의 손실을 봤고, 잭 마는 수년 동안 공공의 시선으로부터 사라졌다. 그 추문에 뒤이어, 이 그룹집단은 “구조조정”을 거쳤는데, 잭 마의 통제력이 53.46%에서 고작 6.2%로 떨어졌다. 분명히 그의 변호사들은 사적소유가 중국에서는 불가침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잊었을 것이다.
재산관계들에 있어서의 그러한 갑작스러운 변경들이 이 사례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2004년에, 하이얼의 경영간부들이 자신들의 회사소유를 늘리려고 시도했다. 이것이 추문을 낳은 후, 정부는 사전공지도 없이 하이얼은 더 이상 사유가 아니라 국가소유라고 결정했다. 하이얼은 당장에 국유화되었고, 그리로 나서, 수 년의 논쟁 후에는,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사적기업으로 뒤바뀌었다.
중국의 사적소유의 “유연한” 성격은 위기의 시기에 가장 분명하게 보여진다. 코비드 팬데믹 동안, 중국공산당은 어떤 자본주의 국가도 훨씬 넘어서는 방식과 규모로 자원들을 결집시킬 수 있었다. 팬데믹은 모든 곳을 때렸고, 정부들은 모든 종류의 방식들로 반응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나라들은, 그들의 방책들이 아무리 가혹하다 할지라도, 소유의 사적성격에 의하여 제한을 받았다. 그들은 매우 한정된 방식으로 재화와 용역들의 생산의 방향을 잡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에 반해서, 중국은 정부에 의하여 결정된 목표들을 성취하기 위하여 사회의 모든 것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중국이 권위주의적 정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팬데믹 동안에는 모든 정부가 권위주의적이었다), 사적 자본가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계획에 따라서 기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중국의 현재 상황은 소련의 상황과 같지 않다. 사적재산을 소유한 자본가계급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 사적소유라는 현실은 매우 모순적이다. 그렇지만,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자본가들은 그들의 권리들을 아직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완전한 경제적 혹은 정치적 통제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데, 이것은 나라의 무장력들이 그들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공산당 관료집단에게 충성하기 때문이다. 자본가계급이 중국에서 자신의 독재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현실이 바뀌어야만 한다 – 중국공산당의 권력이 분쇄되어야만 한다.
8) 반혁명 혹은 정치혁명?
중국에서 반혁명은 어떤 모습일까?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의 사례들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내전은 가능성이 유력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자본가들이 경제에 대한 제한없는 통제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국가소유 기업들은 훨씬 더 완전한 정도로 사유화될 것이다. 정부는 은행 부문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것이다. 중국 시장을 제국주의 금융에 훨씬 더 의존적이게 만들면서, 자본의 흐름들이 자유화 될 것이다. 구조조정 계획들 속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이번에는, 이것은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하는 와중에서가 아니라 사회적 붕괴의 상황에서 일 것이다. 중국과 타이완이 국민당의 전략적 목표인 반동적 자본주의적 기초 위에 재통일될 가능성 또한 매우 높다. 이런 전개들의 어떤 것이라도 개선된 민주주의적 권리나 시민의 자유들로 귀결될 것이라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
중국에서의 반혁명의 국제적 충격은 마찬가지로 재앙적일 것이다. 소련의 붕괴에서와 마찬가지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종말은 미국과 미국의 동맹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무제한적으로 세계 전역에 자신들의 힘을 투사하도록 허용하면서 그들의 지위를 강화해 줄 것이다. 게다가, 자본주의 복구 속에서 발생하게 될 거대한 생산력들의 파괴는 지구 전역에서 생활수준을 하락시킬 것이다.
오늘날 중국에 방어할 어떠한 것이라도 있음을 부인함으로써, 중국이 자본주의라고 주장하는 소위 맑스주의자들은 이들 재앙적인 결과들을 향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1980년대와 90년대 대부분의 좌익이 따라갔던 배신의 길을 쫓는다. 폴란드로부터 동독과 소련에 이르기까지, 좌익은 반혁명을 응원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아왔고, 오늘 그들은 홍콩 민주주의 항의들과 같은 명시적으로 친제국주의적 운동들을 지지하면서 중국에 대하여 똑같은 짓을 한다. 중국의 반체제인사들을 자유주의 민주주의적 환상들로부터 분리하고, 그들을 공산주의 혁명가들로 훈련하기는커녕, 이들 그룹들은 중국 사회에 반혁명적 경향들을 강화한다.
다행히도, 중화인민공화국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결정적인 요소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중국 노동자계급의 행동들일 것이다. 그러나 반혁명을 패배시키기 위해서는, 중국 노동자계급이 정치적 임무들을 이해해야만 한다. 우선, 이것은 1949년 혁명의 성취들은 중국공산당에 대한 혁명적 타도로만 지켜낼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정치혁명일 것이다. 자본주의 나라에서의 혁명과는 달리, 국가기구는 완전히 분쇄되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으로 숙정되어 노동계급의 정치적 통제 아래로 옮겨져야 할 필요가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퇴행과 광범위한 자본주의 영향력의 정도로 볼 때, 정치혁명은 급진적이고 발작적인 변형이 될 것이다. 중심적인 임무는 자본주의 산업에 대한 몰수일 것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자본가들은 저항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국가가 자신들의 통제력 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에 의하여 좌절할 것이다.
천안문 사태가 보여준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충격 하에서, 최고 명령권자들을 포함하여 중국인민해방군의 전체 전투부대들이 명령을 거부하면서 국가기구 그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음이다. 강력한 사회적 충돌에 직면하여,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공중에 매달려 붕괴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중국에서건, 동독이나 헝가리에서건, 다양한 정치혁명들의 발발들 모두가 기형화된 노동자국가에서의 노동계급 봉기가 국기기구의 대부분을 자신의 쪽으로 가져 올 실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국에서는 이런 결과가 자본가들에 대한 몰수를 간단한 행정적 업무로 만들 것이다. 그러한 국가의 균열은 어떠한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불가능하며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을 구분하는 핵심요소이다.
결론
우리는 중국이 어떻게 자본주의도 아니고 제국주의도 아님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건 간에, 우리가 매우 독특한 현상을 살펴보고 있음은 분명하다. 국가통제와 자본주의를 융합하면서, 중국은 인류역사상 비교가 불가능한 속도와 규모로 발전할 수 있어왔다. 부르주아지 사상가들은 이것을 자유무역 자본주의라는 미국의 세계체제의 승리로 해석한다. 중국공산당 지지자들은 이것을 “중국적 특색들을 가지는 사회주의”의 승리로 해석한다. 중국이 자본주의-제국주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맑스주의자들”로 말할 것 같으면, 중화인민공화국의 엄청난 성취들은 경시되고 부정될 수는 있지만, 설명될 수는 없다.
맑스주의자들로서 중국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2차 세계대전과 냉전의 종결에 뒤이든 매우 특이한 조건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하나의 열강의 압도적인 헤게모니로 인하여 주요 제국주의자들이 통일되었던 상황을 직면하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단 하나의 초강대국이 있는 세상에 직면하지도 않았다. 레닌과 트로츠키를 인용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들의 분석과 강령을 그러한 고유한 현실들로 확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근본적으로, 소비에트 이후 세계의 독창성이 현재의 세계정세와 중국의 발전의 독창성을 설명해준다.
중국의 거대한 발전은 제국주의나 스탈린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독특하고 유일한 조건들의 산물이다. 1989년 천안문 운동의 분쇄는 한동안 정치혁명과 반혁명 모두를 향한 문을 닫았다. 그러므로, 중국은 상대적으로 온순한 국제적 상황을 맞이하여 노동자국가로서 손상을 받지 않은 채 90년대 초부터 부상했다.
표면적으로는, 중국공산당은 악마와의 거래를 통하여 혜택을 보아 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높은 성장과 자본주의와의 공존은 오직 정권에 대한 외부적 압력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뿐이었다. 국제상황이 바뀌고, 미국이 중국과 대적하면서, 성장은 정체되고 내부 긴장들은 증가하고 있다. 계급투쟁을 지우기 위한 중국공산당의 최고의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과 자본가들 사이의 멈출 수 없는 충돌이 정치적 장면의 최전선에서 다시 한번 폭발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국 스탈린주의가 노동자국가를 얼마나 심각하게 썩혀왔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반혁명으로부터 구원될 수 있는지 여부는 노동계급의 선두에 서 있는 정치적 지도부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다. 만약 친자본주의 세력들이 지도부를 장악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은 운명을 다할 것이다. 만약, 어떤 형태로건, 스탈린주의를 달래준다면, 역시 중화인민공화국은 운명을 다할 것이다. 승리를 향한 유일한 길은 제국주의에 가차없이 반대하는, 혁명의 사회적 성과들을 방어하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타도하는,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국제 노동계급 동맹을 건설하는 제4 인터내셔널의 길이다. 중국의 특이한 발전이 국제적인 계급투쟁의 산물이었던 것처럼, 중국의 미래 운명 또한 세계의 노동자들과의 단결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당면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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