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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전위 1184호 2025년 4월 3일자로부터의 번역
노동계급과 피억압 인민들은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 강력한 타격에 직면해 있다. 어제는 오만하게 “반 인종주의”와 친 트랜스젠더 정책들을 추동했던 자유주의자들은 모든 그런 발언들을 포기해왔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가 한 때 정체성 정치의 모범적 소지자였던 캘리포니아 주지사 개빈 뉴섬인데, 현재 그는 우익으로 접근하면서, 그리고 트랜스젠더 청소년들에 대한 방어를 포기하는 가운데, 민주당의 캔슬 컬쳐의 “독성”을 규탄하면서 자신의 시간을 보낸다. 이 패러다임에서의 총체적 변화의 와중에 공격들이 강화되고 있는데, 맑스주의 좌익은 홀로 바람 속에다 고함을 친다. 그들은 “트럼프와 억만장자들”에 대하여 비명을 지르지만,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떤 임무들이 제기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완전히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착각하고 있다.
맑스주의자들의 역할은 노동계급이 전진하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현재, 좌익에게 그 임무는 좌익의 고립을 깨뜨리고, 스스로 계급 속에 뿌리내려, 전체로서의 계급의 이해관계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노동계급의 투쟁에 개입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다수가 트럼프 행정부를 지지하고, 주류 자유주의자들로부터의 지원에 의존하는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완전하게 고립되어 있는 현재를 인정하는 것 없이는 트럼프에 맞서는 싸움을 준비할 수 없다. 이 현실을 부정하면서, 좌익은 공세로 나아가기에 때가 무르익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트럼프의 거대한 공격에 직면하여 노동계급의 방어능력들을 개선하기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며, 그래서 처참한 패배로 끝날 수 있을 뿐이다.
좌익은 계몽된 “자각”라는 장막으로 스스로를 가린 민주당 자유주의자들이 전세계적으로 노동자들과 빈민들을 짓밟던 지난 수십 년을 이들의 꽁무니를 쫓으면서 보냈다. 이제, 지배계급은 더 이상 그 장막을 감당할 수 없고, 트럼프주의가 세계질서를 미국 제국주의의 필요에 맞도록 새로 만들기 위하여 기세 등등하게 시도한다. 민주당 내부에서 사회주의적임을 주장하는 자신의 모순에 의하여 11월 이전에 대체적으로 마비가 되었던 DSA(미국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인민들이 민주당의 “품으로 되돌아”오도록 하기 위하여 경제적 포퓰리즘을 밀어부침으로써 이러한 전환에 반응해왔다.
버니 샌더스와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의 “소수 지배집단과의 투쟁” 순회 연설회의 목적이 이것인데, DSA가 “실제로 머스크를 패배시키고 나서 트럼프를 패배시킬 수 있는 운동”을 촉발할 잠재성을 가진 것으로서 이 순회 연설회를 칭찬한다. 비슷하게, 그들의 뉴욕시 시장을 위한 민주당 후보인 조란 맘다니는 특수하게 억압당하는 그룹들에 아무것도 내놓지 않으면서 생활비 위기에 집중한다. DSA 의 일부는 좌익과 노동계급 사이에 열려있어 온 넓은 차이를 인정하지만, 그들의 답은 증오의 대상인 민주당 자유주의 세력을 재단장한 버전에 노동자들을 다시 족쇄 채우는 것이다.
반대로, 대부분의 좌익은 어떠한 그러한 차이라도 존재한다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과거에 갇혀있다. 우리가 “트럼프 아젠다에 반격을 가할”수 있도록 “가능한 가장 폭넓은 노동계급 연합을 건설”할 것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대안(SA)를 예로 들어보자. 동지들은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들은 대답한다: 자유주의 민주당 지도부 아래 수백만 명이 거리에 나왔던 2006년 메이데이 이주의 권리 행진들의 모델에서. 2006년 이주의 권리 운동을 “역사적 전례”로 부르는 것에 있어서, 좌익의 소리와 미국 혁명적 공산주의자들(RCA) 같은 조직들이 SA에 합류한다.
이 운동이 자유주의자들에 의하여 배신당했다는 사실에 더하여, 그런 운동의 부활이 곧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주류 자유주의자들은 특히 피억압 인민들의 대의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 그들은 이주민들, 흑인들, 혹은 트랜스젠더들을 방어하기 위한 대규모 연합들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효과적인 반 트럼프 운동을 건설하는 길은 자유주의자들에게 돌아오라고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이해관계에 근거한 새로운 기초를 다지는 것이다. 좌익들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우리는 2006년에 있지 않고, 2025년에 있다!
환각에 취한 채, RCA는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 더 혁명에 가까이 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다: “수없이 많은 요인들이 미국 노동계급의 한 층을 혁명적 결론들로 밀어 부치고 있다.” 한편으로, 그들은 “좌익이 맺고 있는 자유주의자들과의 유대들이 노동인민들의 목전에서 좌익의 신임을 떨어뜨리는데 복무해왔을 뿐”임을 인정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자유주의를 거부하면서 노동계급이 오른쪽으로 움직였음을 부인하는데, 대신에 그들은 이것을 “자유주의자들의 위선적 가면이 더 이상 노동계급의 상당한 부분을 속이지 못하는 한 걸음 전진”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트럼프의 승리는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적 반발이었다. RCA는 이 반발이 의식성에서의 약진이며 그래서 그들 스스로가 현재의 고립을 뛰어넘어 혁명을 의제로 상정할 수 있다고 표현한다. 이것이 이끌 수 있는 단 하나의 방향이 있는데, 재앙이다.
그들 나름대로, 좌익의 소리는 우리가 만약 단결한다면 우리는 “모든 트럼프의 공격들에 반격하기 위한 운동을 건설”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ICE(이민세관단속국) 철폐, 국경개방, 이스라엘로부터의 투자회수, 학생, 교원, 교직원, 그리고 공동체가 운영하는 자유로운 공공 대학 등과 같은 더 많은 것을 위하여 투쟁”할 수 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이것은 상황에 대한 완전한 오독이다. 예를 들면, 노동계급의 대부분은 자본과 인민들을 위한 국경개방을 그들의 삶을 황폐화시킨 바로 그것으로 바라본다. 보호주의, 대량 추방들, 그리고 트럼프의 스트롱 맨 접근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진전시킬 것이라고 잘못 믿으면서, 많은 이들이 타당한 분노로부터 트럼프에 투표했다.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 척 하는 것은 좌익의 소리가 노동계급을 향한 길을 찾지 못하게 할 것일 뿐이다.
비슷하게, 집단학살이 맹렬하게 계속되면서, 사회주의와 해방을 위한 당(PSL)은 현실을 뒤집고, 허약하고 고립된 팔레스타인 운동에 대하여 “커지는 탄압에 직면하여...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운동은 더욱 강하게 성장하고 있었을 뿐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런 미친 짓은 개인적으로 위안은 될지 모르지만, 팔레스타인 인민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자포자기한 실천들로 귀결될 수 있을 뿐이다. PSL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작은 항의들을 추방들에 반대하는 대중운동으로 과장하면서, PSL은 “미국 전역의 이주자들과 공동체들이 대규모 항의들에 호응하고 있으며 그들의 힘을 보여주기 위하여 두려움없이 반격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많은 노동자들 사이에서의 트럼프의 추방들에 대한 지지로 인해 커진 거대한 두려움이 이주민들의 공동체들에 있다는 것이 진실이다. 목적은 이주민 투쟁을 왜곡해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 보다는 노동계급을 이주민에 대한 방어로 획득하는 것이어야 한다.
노동운동에 대한 공격들에 대한 좌익의 대답이라고 해서 별반 나을 것이 없다. 수십 년 동안, 노동조합 관료집단은 어떠한 전투적 저항이라도 그들이 동맹을 맺고 있던 민주당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들 밖으로 나아가는 것을 억제했다. 그러나 그 선거 이래로, UAW의 션페인과 팀스터스의 수장 션 오브라이언 같은 똑 같은 관료들의 다수가 바람이 부는 방향을 감지했고, 입장을 바꾸어 트럼프의 아젠다에 동조해왔다. 좌익은 이것이 배신임을 분명하게 인지하지만, 그 배신을 페인과 오브라이언이 처음부터 있어 온 길과 일치시킬 수가 없다.
그러나 페인 그 자신이 설명했듯이 “우리는 우리의 입장, 우리의 원칙들, 혹은 우리의 임무를 바꾸지 않아왔다.” 이것은 2024년 UAW 자동차 파업을 포함하는데, 이 때 좌익은 파업 요구안을 쟁취하기 위하여 필요했던 정면대결에 연루되는 것을 페인이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응원했다. 목적은 항상 미국 제국주의의 소위 우호적인 한계 안에서 조금 더 나은 합의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만약 그것이 바이든으로부터 트럼프로 모자를 바꿀 것을 요구한다면, 그렇게 한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노동자들을 단결시켜 꼭 필요한 단체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이들 관료들이 진정한 계급투쟁 지도부로 대체되어야만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니다. 역겨울 정도로 지나치게 오브라이언의 최근 아마존 스트라이크 곡예를 고취했던 좌익의 소리가 마침내 지금은 “페인과 오브라이언 같은 관료적 배신자들을 제거”하라고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을 돌려세우기 위해서 어떤 종류의 지도부와 전략이 필요한 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다. 이것은 그야말로 조합원들을 모종의 친자본주의 지도부에 떠 넘기는 것이다. SA 와 같은 다른 좌익그룹들은 이 잘못된 지도자들이 깨달음을 얻기를 간청하는 한편으로 “수치심”을 계속해서 외친다. SA는 염치없게도 “트럼프와 함께 하겠다는 그의 선언을 되돌리고, 공개적으로 미국에서 노동당을 건설할 것을 주창하고 조직하라”고 페인에게 구걸한다. 그러나 실제로 노동인민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노동당은 이들 배신자들에 의해서는 결코 건설되지 않을 것이다.
빠질 수 없다는 듯이, SA로부터 분리한 노동자들의 반격(WSB) 또한 노동계급이 우익으로 이동해왔음을 부인하며, 실제로 현재 노동계급은 “어느 때 보다 진보적이라고” 주장하면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이 착각은 정치적 기호에서 기인한다: 선거 동안, 질 슈타인에 전력투구 하기 위하여 WSB의 본부가 있는 시애틀에서 파업중인 보잉 기계공 노조를 버렸던 WSB는 이제 노동계급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자유주의 녹색당 같은 모든 “진보적” 세력들에게 자신의 문을 열면서, 자신의 지지세력들 조직하고 있다. 물론, 노동인민들은 그들이 테슬라에 무관심한 것만큼이나 녹색당에 관심이 없다.
이 모든 것이 의문을 갖게 한다: 왜 좌익은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평행 우주에 갇혀 있는가? 많은 부분, 진실을 말하는 것이 청년 활동가들의 사기를 꺾고 좌익을 더욱 고립시킬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혁명가들의 첫 번째 임무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고, 환상으로 활동가들을 달래는 것이 가장 큰 범죄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과 현재의 의식성을 잘못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임무들을 내오는 것으로 귀결될 뿐이다.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은 사기저하와 탈진의 비결이고, 일부에게는 심지어 더 한 탄압을 야기하게 될 초좌익 모험주의로의 전환이다. 만약 좌익이 트럼프의 공격들(“노동자들: 충격에 단단히 대비하라!”를 보시오)로부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필요한 방어적 투쟁과 같은 것을 위하여 노동계급을 준비시키기 위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면, 좌익은 방향을 바꿔야만 한다.
스스로를 혁명가들이라고 여기는 동지들은 산업 노동조합들의 조직화로 귀결되었던 대파업들 2년 전인 대공황이라는 처참한 상황이었던1932년에 미국 트로츠키주의의 창시자 제임스 P. 캐넌이 썼던 아래와 같은 몇 몇 기본적인 조언들에 제대로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만약 혁명정당이 진정으로 계급 세력들의 충돌들을 가속화하고 그것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노동자들의 분위기와 성향에 관한 통찰력있는 연구가 매일 매일의 전술들과 혁명정당의 활동 방식들에 선행되어야만 하고 그것들을 통제해야만 한다….
“공산당의 노동자들은 노동계급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노동계급의 의식적 부위이며, 현재 미국에서 그들은 작고 수적으로 하찮은 부위이다. 공산당의 노동자들만으로는 진정한 계급전투들이 불가능하다. 그들의 기능은 노동자들, 그들의 선진인자들과 함께 싸우는 것이다. 이 순간 공산당의 임무는 다가오는 투쟁들을 위하여 노동자들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이 임무의 중심에 ‘인내심 있는 설명 작업’과 투쟁의 방향으로 노동자들을 획득하기 위한 선동과 선전 활동이 있다. 이 일상적 임무를 대체할 것은 없으며, 그것을 건너뛸 방법은 없다.”
—The Militant (투사), 1932년 3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