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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clfi.org/pubs/icl-ko/2024-bg-exchange

5년 전 ICL과의 토론들을 최초로 가진 이후, 작년 말, 한국의 볼셰비키 그룹(BG)는 우리의 8차 국제대회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적 논평을 담은 서신을 우리에게 보냈다. 이것이 일련의 새로운 서신교환들과 구두토론들로 귀결되었고, 아래에 출판되는 서신들에 서술되어 있다.

이 토론들은 우리의 근본적인 차이들이 반제국주의 투쟁의 혁명적 지도부의 문제들에 집중되어 있음을 분명히 했다. 제국주의 중심국들이나 제국주의 동맹국들의 노동자들이 사회적-배외주의로부터 분리할 수 있기 전의 노동자들은 억압당하는 인민들의 “응징”을 당해야만 한다는 자신의 관점을 BG가 고수하면서 토론들은 교착상태에 이르렀다. 우리의 2번째 서신이 강조하듯이, 이것은 세계의 프롤레타이라트를 분열시키고, 노동자들을 그들의 사회적-배외주의 지도자들로부터 분리시켜내기 위한 어떠한 정치적 투쟁도 약화시킴으로써, 제국주의를 강화해줄 수 있을뿐인 완전히 반동적인 입장이다.

명백한 인쇄상의 오류를 수정하고 괄호 속에 삽입한 것을 제외하고는 서신들에 대한 편집은 없었다. BG의 문서들에 있는 모든 영어는 BG가 쓴 것이다.


국제공산주의동맹에 보낸 편지

2023년 11월 10일

우리 볼셰비키 그룹은 지난 2018년 IBT 내에서의 격렬한 분파투쟁 끝에 분립을 결정하였다(「IBT로부터의 분립과 혁명 사상의 연속성」 참조). 그보다 1년 전, 귀 단체는 「국수주의 히드라에 맞선 투쟁(The Struggle Against the Chauvinist Hydra)」이라는 장문의 총회 문서를 세상에 공개하였다. 그것은 ‘영미국수주의(Anglo-chauvinism)가 ICL 그리고 이 조직으로부터 분립한 IBT, IG에 어떻게 고질적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물론 그 문서는 캐나다 민족문제를 중심으로 주로 제국주의 내부 민족문제에 집중하고 있으며, 제국주의 vs 식민지 갈등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2017년 ICL의 자기 반성은 레닌주의로 돌아올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었다. 이 입장 변화는 당시 IBT의 ‘영미국수주의’에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 근원을 추적하던 우리의 흥미를 끌었다.

그리하여 2019년 3월 우리의 요청에 호응한 ICL 동지들과 서울에서 토론하였다. 토론은 상호존중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1979년~1983년 이란 등 주로 제국주의와 식민지 문제에 있어서 ICL 동지들은 여전히 이전의 중립 입장을 고수하였고, 결국 이 문제에서 서로는 입장을 좁히지 못한 채 헤어졌다.


그러다가 2019년 12월 우리는 워커스뱅가드 1167호 기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의를 페이스북에 남겼다. 그러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Then, in December 2019, we asked the following questions on Facebook about the article from Workers Vanguard # 1167. But we never heard back.

Our Questions on ICL’s position on Syria: reading 13 December 2019

“These warring sides have received support from foreign imperialist or regional powers. For example, Russia and Iran have backed Assad, while the Pentagon and CIA have armed and financed various Sunni forces fighting the regime.”

―Workers Vanguard No. 1167, 13 December 2019, On the Syrian Civil War

The ICL raises the support of imperialist or regional powers by both sides who took part in the so-called “civil war” as a basis for neutrality.

So,

1) Can “regional powers” be equated with imperialism?

2) Is Russian and Iranian intervention imperialistic?

3) Is “Syrian civil war” a competition or proxy war between imperialist rivals?

Marxists should not only present the phenomena as they are, but also explain the real foundation, or nature. But the ICL does not explain why the conflict, which it describes as a “civil war or communal war” (that does not express an imperialistic character at all), and why the imperialist U.S. and regional powers Russia and Iran are involved.

4) What is the background of imperialism and local powers’ involvement in this conflict, which is nothing but a “civil war”?


“Though it has intervened in Syria, the U.S. has not decisively entered the civil war with its own armed forces to remove Assad. If Washington were to launch a direct attack or invasion of the country, Marxists would take a military side with Assad’s forces against imperialist assault while maintaining our political opposition to his rule.”

―ibid

During the past eight years of war, behind the “civil or communal war”, the United States has not only provided financial, military, and PR support to the anti-Assad rebels, but has also staged various military operations, staying within Syrian territory. Nevertheless, the ICL says, “If Washington was to run a direct attack or an investment of the country. Marxists would take a military side with Assad’s forces against imperialist assault while maintaining our political opposition to his rule.”

So. 5) what does the “direct attack or involvement” mean to ICL? How do you define it?


다행스럽게도 귀 단체는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일어섰다.

2023년 9월, 8차 국제총회를 총괄하는『스파르타시스트(Spartacist)』68호를 발표하였다. 이번 호는 ICL을 위시하여, 소위 ‘스파르타시스트 패밀리’가 자랑스러운 혁명전통인 양 표출해왔던 민족문제에 있어서의 기권주의적, 영미국수주의적인 태도에 대한 자기비판적 논문을 다수 담고 있다. 그 점에서 큰 관심을 가지고 꼼꼼히 읽어보았다. 특히 이란 문제 등 지난 2019년 만남에서 ICL 동지들이 완강하게 고수하던 입장이 바뀌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우리 볼셰비키그룹은 다음과 같은 논문들을 읽고 토론하였다.

「소련 붕괴 후 ICL의 수정주의(The ICL’s Post-Soviet Revisionism)」

「ICL은 왜 붕괴했고,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Why the ICL Collapsed & How We Reforged It)」

「코민테른 제2·4차 대회를 옹호하며(In Defense of the Second and Fourth Comintern Congresses)」

「연속혁명과 여성해방(Permanent Revolution & Women’s Liberation)」

「말비나스 전쟁 : 주적은 제국주의였다(Malvinas/Falklands War: The Main Enemy Was Imperialism)」

「연속혁명을 옹호하며 : 반제투쟁의 공산주의 지도부를 위하여(In Defense of Permanent Revolution: For Communist Leadership of the Anti-Imperialist Struggle!)」


오늘은 ‘제국주의와 민족해방투쟁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주제와 관련된 논문에만 주목하여 우리의 감상을 전하고자 한다.

먼저,「소련 붕괴 후 ICL의 수정주의」는 ICL 제8차 국제총회가 채택한 문서 중 하나이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ICL은 소련 붕괴 이후의 시대를 잘못 이해했다. 우리는 냉전 종식이 격화된 제국주의 상호경쟁을 낳을 것이라고 봤지만, 실제로는 미국 패권 하에서 제국주의 열강들이 공동으로 세계를 약탈하는 상대적인 지정학적 안정이 조성되었다. 또한 리버럴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고, 자유주의적 요구를 혁명적인 것인양 묘사했다. 결국 피억압인민을 방어하는 투쟁에서 리버럴 지도부의 꽁무니를 좇았다. ICL로부터 국제주의그룹(IG)이 분립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무원칙하고 종파주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IG의 ICL에 대한 비판 일부[관념론적 수동적 선전조직이라는 비판, 계급투쟁 개입 포기, 아이티·푸에르토리코에 대한 입장 비판]는 옳다. 그럼에도 IG 역시 ICL의 오류를 상당부분 답습하고 있다. IG는 과거의 ICL이 그러했듯이 피억압민족의 민족운동을 종파주의적으로 적대한다. 이제 우리는 IG와 진지한 정치토론, 공동행동을 함께 할 준비가 되어있다. 소련 붕괴는 ICL 퇴보의 전환점이었다. 고참 간부들은 조직을 바로잡을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ICL은 죽지 않았다. 당은 혁명적이었던 과거에 이끌린 활동가들을 획득해냈다.’

민족문제에 대한 기권주의가 잘못되었다고 인정한다는 점에서 이 글은 고무적이다.


다음으로,「코민테른 제2·4차 대회를 옹호하며」는 코민테른 제2·4차 대회에서 채택한 민족해방론을 옹호하면서 과거 iSt 시절부터 이어진 레닌주의 수정을 반박하는 논문으로 요지는 다음과 같다.

‘ICL은 코민테른 첫 4개 대회를 지지한다고 주장했지만, 식민지 혁명과 관련해서는 예외를 두었다. ICL에 따르면 스탈린과 부하린의 배신은 코민테른 제4차 대회에서 태동하고 있었다. ICL은 공산주의자들이 민주주의 투쟁에 참여하는 것을 계급문제에서 벗어난 멘셰비키적 계획으로 여겼다. 1922년 테제는 ICL과 정반대로 ‘식민지 공산주의자들이 계급이익의 방어를 핑계로 제국주의 폭정에 대항하는 투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최악의 기회주의’라고 했다. 반제국주의 공동전선은 오늘날에도 민족해방투쟁이 부르주아지의 손에 달려있는 나라에서 필수적이다. 부르주아 영향력을 깨뜨리기 위하여, 공산주의자는 투쟁의 변두리에 비평가로 있지 말고, 투쟁의 한가운데에 있어야 한다.‘


「말비나스 전쟁 : 주적은 제국주의였다」는 1982년 ICL의 말비나스 전쟁에 대한 중립 입장을 뒤엎는, 당시에 신식민지 아르헨티나를 방어했어야 했다고 주장하는 글이다.

‘영국에게 있어서 이 전쟁은 제국주의 식민지 소유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승리는 노동계급의 이익이 될 것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민족해방을, 영국에선 노동계급이 영국 제국주의에 반대해 분기하게 했을 것이다. 이번 총회에서 우리는 양자 모두의 패배라는 과거의 입장을 거부했다. 민족해방투쟁의 지도력을 두고 민족주의자들과 경쟁했어야 했다. 제국주의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공산주의 지도력이 필수적이다. 영국 제국주의를 타도할 유일한 방법은 양국 노동자의 동맹을 통해서였다. 민족주의는 그 투쟁의 장애물이다.’

「연속혁명을 옹호하며 : 반제투쟁의 공산주의 지도부를 위하여」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식민지에서 혁명정당은 제국주의 억압에 맞선 투쟁을 이끌면서 피억압민족의 프롤레타리아와 대중들을 교육시켜야 한다. 객관적 과정’이 해방과 사회주의로 이어진다는, 소부르주아 지도부가 사회주의를 할 수 있다는 주장[파블로주의]에 SL은 반대했다. 그러나 식민지 민족운동을 단지 반동적이라고 종파주의적으로 반대했다. 청산주의에 옳게 반대했지만, 연속혁명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ICL은 민족문제를 사회주의 혁명에 부정적인 장애물로 보았고, ‘혼합민족’ 이론을 주장하면서 팔레스타인/아일랜드 민족해방을 부정했다. 1979년 이란의 反샤(Shah)투쟁의 진보적 성격을 무시했다. ICL은 식민지 국가에 대해서도 ‘주적은 국내에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잘못되었다. 식민지에서 주적은 제국주의이다. 피억압민족의 국가건설은 역사적 진보이다. ICL은 트로츠키의 독립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요구를 반대하는 입장을 내놓는 오류를 범했다. 에드문드 사마라코디는 SL이 제국주의와 민족부르주아 사이에 모순이 없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고 지적했다.’

이 논문은 ICL이 파블로주의의 우익기회주의를 비판하다 종파주의적 입장으로 빠진 것에 대한 자기비판을 담고 있다. 특히 이란 혁명에 대한 입장 정정은 우리가 줄곧 주장한 입장과 완전히 합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올바른 입장으로 되돌아 올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하는 점은 조직의 생명력을 판별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그런 점에서 ICL의 8차 국제총회 결과는 매우 고무적이다. ‘ICL은 혁명적 연속성에서 아직 완전히 이탈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아직 조직적 생명을 다하지 않았다.’라고 우리는 판단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미 있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ICL은 이전의 관성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란과 말비나스 등 과거 비판받은 입장을 변화시키기는 했지만 지금 전개되고 있는 사건에 대해서는 여전히 같은 입장인 것처럼 보인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하여, 여전히 양쪽 모두의 패전을 주장하면서 러시아, 돈바스 인민의 민족자결과 자기방어권을 부정하고 있다. 시리아 내전에 대해 여전히 ‘미제가 직접 군사개입하지 않는 한 중립’을 고수하고 있는지 아니면 기존 중립 입장을 철회하였는지 밝히지 않는다. 우리가 2019년 12월 보낸 질의에 대해서 답변을 들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덧붙여, 지난 10월 10일 ICL가 발표한 성명서「하마스와 함께는 죽음과 패배가 있을 뿐 :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혁명적 길」에 ICL이 미처 청산하지 못한 과거의 초좌익적 기권주의의 유산이 짙게 남아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이 성명에서 ICL은 추상적으로 ‘가자의 방어’를 주장하지만, 가자 지구에 유일하게 유의미한 방위력을 제공하고 있는 하마스에 대한 군사적 지지를 거부하면서 ‘가자 방어’, ‘팔레스타인 해방’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ICL이 하마스에 대한 군사적 지지를 거부하는 핵심적 이유는 ‘무고한 시민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10월 14일 팔레스타인 전쟁에 대한 입장에서 이 문제를 다룬 바 있다.

From a military perspective, the prevailing view is that the Hamas-led raid was reckless. As it can be seen now, Hamas is militarily overwhelmed by Israel which is backed by the superpower, the US. But just as even earthworms squirm when stepped on, this counterattack is a reaction and a struggle of the Palestinian people who are on the brink of death. The British-US imperialism and Israel have been strangling the Palestinian people for a long time, and a strangled opponent can only resist in any way possible. We recognize that resistance as a just self-defense for life and honor.

The imperialist media accuses Palestinian militants of indiscriminately attacking civilians, but the Palestinian Arab people do not have the sophisticated and powerful weapons which the US and Israel have. They do not have the capacity to attack while distinguishing soldiers and civilians and still win. Meanwhile, imperialists have carried out massive massacres and detentions of civilians in Palestine and elsewhere in the world with impunity, but the imperialist media has shamelessly turned a blind eye to the innocent deaths of colonized peoples around the world, even now.

And the Israeli “settlers” who have been closing in on Palestinian Arab neighborhoods are the direct beneficiaries of Palestinian expulsions and settlement expansion. Not only that, but they are also active agents of Israel’s ethnic oppression.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2021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Being a tribune to all oppressed people, the socialist-oriented world working class will never tolerate the sacrifice of innocent people. However, if the people who serve as supporters of imperialism confront the anti-imperialist national liberation struggle, we recognize that the retribution against them is justified. Only the working people in oppressing countries, actively fighting for the liberation of the oppressed people against their own invader government, would be considered on the same side. We consider them the only innocent citizens who have nothing to do with imperialism. Only they can be granted the right to live in peace and safety.”

―「Palestinian Liberation and "Social Patriotism”

현 시기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반제국주의 공동전선”이 시급한 곳이 팔레스타인이다. 우리는 ICL 동지들이 때늦지 않게 이 “반제국주의 공동전선”에 참여하기를 희망한다. 시리아와 우크라이나에서도.


볼셰비키 그룹에 보낸 편지

2023년 12월 23일

볼셰비크 그룹 동지 귀하,

우리의 제8차 국제대회를 검토한 동지들의 편지를 받게되어 기뻤다. 영구혁명에 대한 우리의 현재의 이해에 비추어볼 때, 우리 두 조직들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의견교환들은 근본적으로 흠결이 있었다는 점이 분명하다. 우리는 동지들 그룹과의 토론을 재개하고 오프라인에서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가능성에 행복하다.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와 한국

동지들의 서신에 따르면, 동지들은 우리의 대회 주요 문서인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와 노동자 권력을 위한 투쟁”을 아직까지 검토하지 않았다. 이 문서에서 우리는 소비에트 이후 시대에 국제화와 자유주의의 패권이 어떻게 미국 제국주의의 헤게모니에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1991년 이래의 맑스주의자들의 임무가 그 정치가 제국주의 부르주아지 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했던 자유주의 지도부로부터 국제노동계급을 분리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었음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을 하기는커녕, 맑스주의 좌익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물질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부르주아지 계급 그 자신이 유포했던 도덕적 원칙들에 기초하여 제국주의의 최악의 과도함들을 규탄하면서 제국주의에 대한 순전히 자유주의적 비평을 했다. ICL, IBT 혹은 그 어떤 다른 조직들도 어떻게 그리고 왜 노동계급과 피억압 인민들의 즉각적 이해관계를 위한 투쟁이 부르주아지 자유주의로부터 계급적 분리를 필요로 했는지를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이 실패가 지난 30년 동안 좌익들을 병들게 하던 위기를 설명해준다.

우리의 한국에 대한 지식은 매우 제한적이다. 하지만, 우리의 문서가 중요한 기본적인 통찰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믿는다. 남한과 같은 나라들은 1980년대 이래 노동계급의 정치적 강력함에서의 후퇴를 목격하는 것과 동시에 상당한 경제적 발전과 부정할 수 없는 민주화를 이루었다. 노동계급 사이에서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환상들을 부채질해 온 거대한 모순이 이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한국에 있는 맑스주의 정당은 그러한 개량주의적 환상들에 대한 유물론적 논박에 기초하여 건설되어야만 한다. “제국주의에 의하여 억압받는 나라들”이라는 소제목 하의 우리의 대회문서 3부에서, 우리는 남한과 같은 나라들에서 80년대, 90년대의 정치적 발전들에 대한 아래와 같은 일반적인 설명들 제공한다:

정치적 수준에서, 자유주의 민주주의로의 국제적 수렴은 부분적으로는 사회적 격변을 저지하기 위한 최적의 방법으로서 민주주의적 개혁들 점점 더 바라보았던 미국 외교정책의 결과였다. 그러나 신식민지 나라들의 국내정권들은 또한 국제적으로 노동자운동의 약화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엘리트들은 양보를 위한 여지를 허용하는 가운데 그들의 지위에 대하여 더욱 자신만만했던 반면, 피억압인민들은 급진적 변화를 포기하라는 압력이 증가하는 가운데 불리한 국면에 처했다. 이것이 남한, 대만, 브라질, 그리고 남아프리카와 같은 나라들로 하여금 유사 전체주의적 독재들을 부르주아지 민주주의라는 방책으로 대체하도록 허용하면서 국내의 모순들의 예리함을 감소시켰다.

보다 일반적으로, 이차대전 이후 남한 역사 전체는 미국 세계질서의 최전선 국가로서 바라보았을 때 이해될 수 있다고 믿는다. 첫째, 주요하게 북한에 대한 반공산주의 기지로서. 그리고, 냉전이 끝나가면서, 그리고 사적소유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면서 남한 대중들에 대한 목조르기를 느슨하게 할 수 있게 되면서, 남한의 역할은 새로운 차원을 갖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이후 시기에, 남한은 민주주의적 허울을 수용하고 증가된 국제무역과 자유화된 자본흐름의 가장 중대한 수혜자 중의 하나가 되면서 자유주의적 세계질서 속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1997년 위기에서 보여지듯이) 제국주의에 의존적이고 제국주의에 의하여 억압받으면서 진행되었다. 미국의 세계질서가 허물어지면서,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되돌려지고, 남한 내에서 뿐만 아니라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지극히 첨예한 계급갈등을 유발할 것이다.

이러한 언급들은 물론 남함에 대한 우리의 부족한 지식으로 인하여 매우 폭넓고 일반적이며 제한적이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는 소비에트 이후 시기에 대한 우리의 개괄이 한국적 상황에 적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맑스주의 전위가 방침을 세우는 것에서 핵심적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동지들이 우리의 문서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한국의 역사, 한국과 미국 제국주의와의 관계, 그리고 한반도 노동계급혁명을 진척시키는 데 있어서 중심적인 장애물들에 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관하여 알게 되는 것에 관심이 크다.

혁명적 지도부

동지들의 최근 선전문과 IBT와의 분리 이후 출간된 분파문건들에 우선 기초하여, 우리는 우리 두 경향들 사이의 중심적인 차이는 혁명적 지도부의 문제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우리의 전체적 방향재정립에 있어서 중심심적인 것이고 그래왔다. 사태들에 대한 혁명적 개입이라는 목적에 의하여 안내받지 않았다면, 우리는 재무장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맑스주의는 실천에 대한 안내이고, 맑스주의적 분석은 오직 사회주의로의 행군을 저지하는 중심적 장애물로서의 현재의 노동계급 지도부에 대하여 발휘될 때에만 혁명적 성격을 갖는다. 이런 맑스주의의 기본에 대한 ICL의 거부가 소비에트 이후 시기 우리의 방향상실의 뿌리에 있었다.

동지들의 선전이 우리 스스로가 분리했어야 했던 것과 비슷한 비형명적이고 융퉁성없는 형식주의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첫인상이다. 우리는 동지들의 조직이 특정한 문제들에 관하여 분명한 입장들을 취하지만, 보다 폭넓은 전략적 용어들이건 혹은 보다 단기적인 즉각적 의미에서건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한 어떠한 구체적인 행동방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인식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검토했던 기사들에 기초하여, 우리는 동지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동지들이 우리의 새로운 스파르타시스트에 있는 많은 지점들을 정확하게 관련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스파르타시스트 최근호 전체의 중추에 해당하는 혁명적 지도부의 문제만 독특하게 빠져있다. 예를 들면, 동지들은 영구혁명에 대한 우리의 정정의 핵심이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공산주의 지도력의 문제임을 언급하지 않는다. 서구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전의 굴종을 거부하는 것은 단지 신식민지 세계를 위한 혁명적 트로츠키주의 전략을 재천명하는 것의 첫 걸음일 뿐이었다.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은 이 전략의 중심에 있어야만 하지만, 승리하기 위해서는 민족해방과 사회해방을 저지하는 민족부르주아지 계급의 장악력을 분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것이 제국주의에 의하여 억압받는 나라들에서 혁명을 위한 핵심적인 전략적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 두 조직 사이의 다양한 지점에서의 불일치에 관한 토론에서, 항상 우리의 출발점은 그들이 사회민주주의이건 스탈린주의나 혹은 이슬람주의이건 노동계급의 현재의 잘못된 지도자들에 맞서 노동계급의 혁명적 지도부를 위한 투쟁을 오늘 진전시키기는 것이다.

이란

우리의 이전 의견교환들에서, 우리가 70년대 후반 이란에 대한 iSt의 개입을 무비판적으로 방어한 것은 잘못이었다. 하지만,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재정립이 동지들이 줄곧 주창해오던 것과 “완전히 합치”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의 최근 국제대회는 우리의 이전의 접근을 비판했는데, 그것은 “전체 틀거리가 제국주의의 목조르기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한 페르시아 대중들의 투쟁이 진보적 투쟁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했기 때문이었다. 제국주의 억압에 대한 투쟁이 당시 격변들의 중심이었지만, iSt는 이 사실을 간단하게 일축하고 소부르주아지 계급 내에서의 투쟁의 고조를 단순히 반동적이라고 성격규정했다. 이것은 동지들이 했던 비판과 유사하다.

하지만, 우리의 의견일치는 여기서 끝난다. 동지들은 2018년 문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슬람 혁명으로의 귀결은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란공산당(Tudeh)의 인민전선, 소련의 수동적이고 방어적 정책, 미국의 적대 정책, 이라크와의 전쟁 등의 상황 속에서 호메이니 분파는 이란공산당, 페다옌, 무자헤딘 등과의 몇 년에 걸친 정치투쟁에서 승리하였고, 그 결과 [1983년 무렵] 이슬람 혁명으로 귀결된 것이다. 이처럼 호메이니의 정권 장악은 그들의 정치능력이 우월해서가 아니라 국내외 정세와 노동계급 지도부의 무능력에 기인한 어부지리였다. 1917년 볼셰비키가 10월 혁명을 성공시키지 못하여 케렌스키가 정권을 계속 유지했다면,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1979년 이란 ‘혁명’ 성격 요약”

충분히 사실이지만, 동지들은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임무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란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이란혁명이 이슬람주의 반동의 승리로 귀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했는가? 이것이 전체 문제이다. 동지들이 이것에 대한 답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샤와 뮬라들 중 차악을 선택하는 것에 남겨져 있다.

동지들은 아래와 같이 쓰고 한다:

이 격동이 사회주의로 전진하지 못하고 퇴보하여 ‘이슬람 혁명’으로 주저앉기는 했지만, 그 혁명은 이란 인민에게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다 주었고, 제국주의 특히 미제국주의에 상당한 타격을 가했다. 미국은 전략적으로 심대한 의미를 가진 중동에서 중요한 교두보 하나를 잃었고, 이란은 미국에 적대국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1979년 이란 혁명은 세계 노동계급에 긍정적인 것이었고, 우리는 당시에 샤 왕조와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에 함께 했어야 마땅했다.

—같은글

샤의 축출이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대단히 큰 타격이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출발점은 단순히 제국주의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을 통하여 제국주의를 패배시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맑스주의자들로서 사태들을 평가한다면, 우리는 제국주의가 타격을 받았는지 여부가 아니라 국제 노동계급의 지위가 강화되었는지 여부를 물어야만 한다. 이런 기준에 따라서, 답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 명백하다. 노동계급 조직들은 분쇄되었고, 이슬람 법이 도입되었으며, 여성과 소수민족들은 오늘날까지 잔혹한 억압에 고통받는다. 실제로, 강력한 이란 프롤레타리아트의 목을 침으로써, 호메이니 정권은 지역전체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에 중대한 타격을 가했다:

이 방책은 우리의 발명이 아니다. 인정하건데, 1939년 소련의 폴란드 개입이라는 매우 다른 상황에서, 트로츠키는 계급투쟁의 일반적 전진으로부터 동떨어진 채 소유관계들의 문제만을 바라보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우리에게 있어서 첫 번째의 정치적 기준은, 아무리 그것이 자체로 중요하다고 해도, 이런 혹은 저런 지역에서의 소유관계의 변형이 아니라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과 조직에서의 변화, 그리고 그들의 과거의 성과들을 방어하고 새로운 것들을 성취할 능력을 높여내는 것이다. 이 하나의 그리고 유일한 결정적인 입장으로부터, 전체적으로 보자면, 모스크바의 정치는 자신의 반동적 성격을 완벽하게 가지고 있다.

—“전중 중에 있는 소련”, 1939년 9월

트로츠키의 주장을 소위 이란 혁명에 적용하기 위하여, 동지들은 단지 “소유관계의 변형”을 “제국주의에 대한 타격”으로, 그리고 “모스크바”를 “뮬라들”로 대체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이란에 대한 우리의 정정이 부분적인 채로 있고 완전한 재평가에 이르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는 당시 무엇이 필요했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접근을 개괄하고 있다:

우리의 임무는 그것이 [반제국주의 투쟁]이 뮬라들의 손아귀에 남아 있는 한, 그것은 필연적으로 민족적 그리고 기타 소수계들을 겨누게 될 것이고, 이것은 그들에 대한 박해로 귀결되는 동시에 페르시아 다수계 자신의 해방을 침식하게 될 것임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뮬라들의 장악력을 깨뜨리기 위한 유일한 길은 그들의 지도부가 어떻게 샤와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대중들의 정당하고 진보적인 열망들에 대한 장애물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영구혁명을 방어하기 위하여”, 2023년 9월

동지들이 “제국주의와 싸우기”의 이름으로 호메이니의 승리의 재앙적 결과들을 경시하는 것은 동지들이 노동계급을 위한 독립적인 길이라는 이 결정적인 요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게 될 것 처럼, 이것은 동지들의 선전에서 항상적인 문제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현재의 사태들에 관하여 우리가 “여전히 같은 입장”, 즉 우리가 우리의 이전 수정주의 강령을 고수한다고 동지들은 주장한다. 이것을 뒷받침 하기 위하여, 동지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양쪽 모두의 패전을 주장하면서 러시아, 돈바스 인민의 민족자결과 자기방어권을 부정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첫째, 우리가 돈바스의 러시아 인민들의 자기결정권을 부정한다는 점은 사실이 아니다. 2014년 이래 돈바스의 인민들은 러시아 연맹으로의 편입을 원하는 쪽으로 움직여 오고 있다. 만약 현재의 전쟁이 단순하게 돈바스의 자기결정에 관한 것이었다면, 우리는 러시아와 군사적으로 같은편에 서는 것에 아무런 문제점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현재 상황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인민들 사이의 민족적 분쟁은 어느 한쪽의 승리를 통하여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이다. 어느쪽이 승리한다고 해도, 결과는 다른 쪽에대한 민족적 억압일 것이다.

메이단 쿠데타에 뒤이어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에서 지지하는 무장봉기가 있었지만, 이것은 현재 러시아가 권리를 주장하는 다른 지역에서는 경우가 달랐다. 최소한 이들 지역에서의 감정은 모순적이다. (크레믈린에 대한 맹신을 나타내는) 2022년 합병 국민투표의 결과들에 대한 어떠한 조작도 없었다고 믿는다고 하더라도, 이들 국민투표들은 오직 이들 영토들 중에서 – 인구의 상당부분이 쫓겨났던 - 러시아가 점령한 부분들에서만 있었으며, 인민들의 감정에 대한 분명한 대변이라고 여겨질 수 없음을 부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전부를 점령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러시아는 전쟁 이전에 인민들이 러시아의 일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던 영토의 상당부분을 점령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동지들 분명히 합시다: 러시아의 목적은 다른 무엇보다도 전략적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의 민주주의적 열망들에 따라서 자신의 군사적 계획들을 세우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근본적으로 분쟁이 러시아 소수계들의 해방을 위한 민족전쟁이 아니라, 다른 무엇보다도 더, 누구의 영향력이 우크라이나에서 지배적일 것인지를 둘러싼 나토와 러시아 사이의 대리전이라는 분쟁의 성격에 도달하게 한다. 러시아가 자신의 영향력의 영역 속에 있다고 여기던 우크라이나로의 나토 영향력의 확장이 2014년과 그 너머에 있는 분쟁의 뿌리에 있어왔다. 2022년 2월부터, 러시아의 전쟁목적은 단순히 돈바스 공화국들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르라이나를 “탈나찌화”하고 “비군사화”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키이브에 일종의 친러시아 정권을 세우는 것을 분명하게 의미한다. 제국주의가 그 나라를 지원한다고 하더라도, 외국의 정권을 바꾸는 것은 러시아의 민주주의적 권리가 아니다. 어떻게 전쟁의 경과가 분쟁의 개시 직후 동지들이 반대하여 경고했던 바를 따르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런 점에서 만약 러시아 군대가 과욕을 부려 군사적 점령을 지속하여 친러시아 정권을 세우려 한다면, 그것은 위험한 도박이며 노동계급에 이롭지도 않다. 그것은 우크라이나 인민의 민족자결권에 대한 침해이다. 서쪽 우크라이나 지역 노동인민의 우익적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하여 러시아와 민족주의적 대립을 격화할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의 공격은 제국주의 하수인 키예프 정권의 포격 도발에 대한정당한 응징이다”, 2022년 2월 26일

동지들의 글, “우크라이나 전쟁과 기회주의 그리고 노동계급”에서, 동지들은 “‘러시아가 제국주의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와 싸우고 있을 뿐’이라는 해괴한 궤변을 늘어놓는다”라고 말함으로써 ICL의 입장을 간단하게 일축한다. 이것은 궤변이 아니다. 나토가 러시아의 민족적 생존을 제기할 러시아에 대한 직접적인 전쟁을 개시하는 것과 그러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우크라이나와 함께하는 대리전을 개시하는 것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완전히 부정해야만 할 것이다. 미국의 약탈적 야욕들과 러시아를 약화시키고 종속시키려는 미국의 욕구를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이 하고 싶어하는 것과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동지들이 우리의 입장으로부터 완전히 보이지 않도록 한 것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슬로건 “총구를 돌려라”이다. 이것은 동지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중립”이 될 것에 대한 요구가 아니고, 그들 자신의 정부들과 제국주의에 대한 혁명적 투쟁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노동자들을 단결시키기 위한 요구이다. 그럴때에만 오직 민족문제가 올바른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다. 그럴때에만 오직 제국주의가 결정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이것은 추상적인 요구가 아니라 월스트리트의 이름으로 학살로 보내지는 우크라이나 노동자들, 그리고 우크라이나 (그리고 다른 소수계들)이 자결권을 가지고 있음을 명백하게 부인하는 푸틴의 대러시아 배외주의를 위하여 그들의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러시아 노동자들을 위한 전진의 길을 제안하는 것이다.

동지들의 기사와 편지는 또한 노동계급의 친제국주의 지도자들의 장악력을 깨뜨리기 위하여 투쟁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ICL이 해왔던 활동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스파르타시스트 [영어판] 67호에 있는 “ EU/NATO 지지자들을 좌익으로부터 내던져 버려라!”, 그리고 9월 8일 의 “우크라이나로 향하는 무기의 선적들을 중단시켜라!”를 보라.) 패배주의나 러시아 방어에 대한 지지에 대한 종이에만 있는 입장을 가지는 것은 한가지 일이지만, 결정적인 테스트는 자신의 민족적 영역에 있는 노동자운동에서의 사회적 배외주의에 맞서 실제로 투쟁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능력이 닿는 데까지 투쟁하기 위해 우리가 추구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입장 혹은 다른 좌익 그룹들의 입장에 대한 동지들의 평가에서 이것이 하나의 요소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재차 말하자면, 동지들의 입장이 가지는 근본적인 문제는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에서, 한국에서, 혹은 다른 어떠한 곳에서라도 동지들의 입장이 사회혁명을 위한 투쟁을 전진시키는 것에 어떻게 복무하는지 동지들은 결코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지한 혁명적 조직이라면 누구라도 현재의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아래의 질문들에 답할 수 있어야만 한다:

1) 어떻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노동자들의 단결을 벼리어낼 것인가?

2) 이 분쟁이라는 상황에서 어떻게 국제 사회주의 혁명을 전진시켜낼 것인가?

3)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에서, 그리고 세상의 나머지 국가들에서 어떻게 노동계급을 그들의 사회적 배주주의 지도부로부터 분리시켜낼 것인가?

동지들은 이 문제들 어떤 것에 대한 적절한 답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우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한 동지들의 기사 “팔레스타인 해방과 ‘사회애국주의’”에서 스파르타시스트 경향에 대하여 행해진 비판의 많은 부분들에 우리가 동의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다. 1973년 사마라코디와의 의견교환을 지적하는 것은 동지들 입장에서 예지력이 있는 것이었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우리 인터내셔널은 우리의 이전 토론들에서 그 문제에 대한 동지들의 주장들을 보다 진지하게 고려려함으로써 분명히 얻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동지들의 최근 서신에서, 동지들은 우리의 스파르타시스트 성명서 “하마스와 함께는 죽음과 패배가 있을 뿐: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혁명적 길”에서 제시된 입장이 그 문제에 관하여 우리 경향이 썼던 이전 글들과 핵심적으로 같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소위 이스라엘에 의한 가자에서의 학살에 반대하는 군사적 입장을 취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주장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가 동지들의 서신에서 동지들이 제기하는 특정한 공식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현재의 우리 상황에서 어떠한 실천적인 결과도 내지 않으면서 우리를 국가탄압의 표적들로 만드는 것에 복무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해도, 우리의 성명서가 어떠한 의미에서도 중립적인 것으로 여기질 수는 없다. 두번째 문장에서, 우리는 팔레스타인 인민들은 “힘에 의한 것을 포함하여 그들 자신을 방어할 모든 권리”를 가진다고 선언하며, 같은 글의 뒤에서 우리는 “군사적 수준에서는, 팔레스타인 인민들에 대한 억압이 견딜수 없는 비용을 지불함을 이스라엘 사회에 보여주기 위하여 IDF에 최대한의 압박을 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라고 선언한다.

우리의 의견 불일치의 진정한 본질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군사적 입장을 취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마스가 10월 7일 공세에서 시민들을 특정하여 표적으로 삼았다는 것에 대한 것이다. 동지들은 시민들을 표적으로 삼은 것을 하나의 차이로 올바르게 확인하지만, 그리고 나서는 이것을 일반적으로 군사적 입장을 취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소위 거부를 위한 근거들로서 잘못 제시한다. 이것은 우리의 입장을 왜곡한다. 이스라엘 시민들을 표적으로 삼기라는 실제의 차이에 집중하도록 하자.

동지들의 입장을 위한 기초는 동지들의 2021년 문서에서 분명하게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에 부역하는 인민이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에 맞선다면, 그들에 대한 응징은 정당한 것이라고 인정한다. 오직 침략자인 자국 정부에 맞서 피억압인민의 민족해방을 지지하며 싸우는 침략국 노동인민만이 같은 편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들만이 제국주의와 무관한 무고한 시민이라고 간주한다. 그러한 침략국 인민만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다.

—“팔레스타인 해방과 ‘사회애국주의’”

우리는 이 입장이 지극히 잘못된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자본가계급과 그들의 노동자 대리인들이 조장하는 배외주의 강령에 대한 책임을 이스라엘 인민 전체에게 지우는 부르주아지 도덕주의로 충만한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 적용된다면 특히 거짓이다. 동지들의 입장에 따르면, 제국주의적 예속으로부터의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의 명목으로는 북한과 전쟁 중인 남한의 노동계급은 정당한 표적들일 것이다. 서울에 대한 핵 타격은 어떠한가? 이것이 제국주의에 대한 남한의 지지에 대한 정당화된 응징일 것인가? 분명하게, 동지들은 이 입장으로 한국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지를 결코 획득할 수 없다. 게다가, 무차별적으로 시민들을 표적으로 삼으면서, 어떻게 “제국주의와 무관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할 것인가? 예를 들어, 이스라엘 좌익 하임 카츠만이 10월 7일 하마스 공격으로 죽었다. 그는 혁명가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팔레스타인 억압을 반대하던 자였다. 그의 죽음은 그가 가자 근처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화되었는가? (“하마스에 의해 살해된 이스라엘인 하임 카츠만은 민주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을 원했다”를 보라, 11월 9일, 자코뱅)

그것이 이스라엘이건, 한국이건 혹은 1944년의 나찌 독일이건 간에, 우리는 특정 시기에 그들이 얼마나 쇼비니즘으로 충만했는지와 무관하게 시민을 특정하여 표적으로 삼는 것에 반대한다. 이 입장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도덕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트로츠키가 개괄했던 바와 같이 계급투쟁을 전진시키기 위한 우리의 목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들은 허용될 수 있고 의무적인 것들이며, 그것들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단결시키고, 억압에 대한 화해불가능한 적대감으로 그들의 가슴을 충만하게 하고, 공식적인 도덕과 민주적 언사로 그것을 반복하는 자들에 대한 경멸을 가르치고, 그들을 그들 자신의 역사적 임무에 관한 의식으로 충만하게 하고, 투쟁에서 자기희생의 용기와 영감을 키우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고 우리는 대답한다. 정확하게 이것으로부터 모든 수단들이 허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도출된다. 우리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말한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결론은 위대한 혁명적 목적은 노동계급의 한쪽을 다른 쪽들에 적대하게 만들거나, 대중들의 참여없이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시도하거나, 대중들 자신과 그들의 조직에 대한 그들의 신념을 ‘지도자들’에 대한 숭배로 대체하면서 더욱 낮추는 그러한 천박한 수단과 방법들을 일축한다는 것이다.

—저들의 도덕과 우리의 도덕, 1938년

하마스의 수단들은 위의 원칙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하마스가 이스라엘 시민들을 표적으로 삼는 것은 팔레스타인 해방을 전진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팔레스타인 인민들에 대한 억압에 대한 이스라엘 인민들의 지지를 더욱 공고하게 하는 것에 복무할 뿐이다. 예를 들면, 1982년 레바논 개입과는 반대로, 현재의 가자 폭격에 대한 이스라엘에서의 인민들의 강한 지지가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스라엘이 국내적으로 단결되어 있는 한, 이스라엘은 군사적으로 패배할 수가 없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어떤 진지한 전략도 이스라엘 내부에서의 양극화를 활용하고 심화시키는 것을 추구해야만 한다. 이스라엘 노동계급은 배외주의에 깊이 충만해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 자신의 조건이 팔레스타인 억압에 의하여 침식당하다. 이스라엘 노동계급은 시온주의 지배계급과 제국주의에 맞서 아랍 대중들과 함께 하는 것에 있어서 객관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만약 소위 맑스주의자들이 이 전망을 위해 싸우지 않고 팔레스타인 투쟁의 지도부를 이스라엘 전부를 하나의 붓으로 색칠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의 수중에 내버려둔다면 그들에게 성공의 기회는 없다.

하마스의 공세가 군사적 수준에서 팔레스타인 인민들의 대의를 전진시켰는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동지들이 동지들 자신에게 말하고 있듯이: “최강대국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에 비해 압도적 열세”이다. 하마스의 공격은 시온주의자들과 제국주의 군화발 아래에서 팔레스타인 인민들이 받는 비인간적 억압에 대한 반응이었다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그러나 하마스의 공격은 그들의 해방을 후퇴시키는 반응이다.

하마스가 취한 행동들에 대한 동지들의 지지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동지들은 아예 하마스에게 가용한 군사기술의 비정확도라는 조건에서 그들은 다른 어떤 선택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주장이라는 애처로운 시도를 한다. 페스티발에 모여 있는 군중을 바로 앞에 두고 쏘는 기관총은 정확도가 매우 좋다. 그러나 동지들은 왜 이런 주장까지 제기하는가? 동지들의 입장에 따르면, 가능한 어떤 무기이건 상관없이 어떤 수의 이스라엘 시민들을 표적으로 삼더라도 정당화 될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동지들은 하마스는 “군인과 민간인을 선별 공격하면서도 승리할 수 있는 역량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마스 전투원은 키부츠에 있는 비무장 시민과의 조우에서 분명히 이길수 있지만, 이것이 어떻게 팔레스타인 해방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전진시키는가? 이것은 다시한번 우리를 문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이끈다: 어떻게 이길 것인가? 팔레스타인에 대한 동지들의 글들에서, 동지들은 어떻게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을 구체적으로 전진시킬 것인지에 관한 전망을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만약 동지들이 이 길을 따르다면, 동지들은 하마스가 따르는 전략이 민족해방투쟁을 저지하는 주요한 정치적 장애물임을 금방 이해하게 될 것이다. 만약 ICL이 하마스의 전략에 반대하는 것에 우리의 공격을 집중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종종 비난 당하듯이) 우리가 제국주의 선전에 굴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필사적으로 팔레스타인 해방 승리의 길을 위한 투쟁을 안내하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운동이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을 보고도 다른 혁명적 길로 운동을 재방향정립 하기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범죄이다.

우리의 스파르타시스트 기사에서 개괄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계급투쟁 전략에 대하여 동지들이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은 충격적이다. 우리 경향이 이전에 그 문제에 관하여 써왔던 어떤 것과도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정확하게 이 측면이다. 우리는 피억압 인민들의 정당한 민족적 열망들을 거부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는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 인민들의 단결을 주창하지 않고, 그렇기 보다는 팔레스타인 해방의 문제를 우리 전략의 중심에 둔다. 우리는 사회주의 미래에는 모든 것들이 좋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고, 시온주의 국가와 제국주의를 패배시키는 것으로 실제로 이끌 수 있는 오늘의 전략을 제기한다.

팔레스타인을 방어하기 위한 동지들의 모든 강한 어구들에 대하여, 우리는 동지들에게 다시 한번 물어야만 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시리아

우리는 아직까지 시리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검토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그렇긴 하지만, 그 입장은 영구혁명과 관련하여 그리고 공산주의 지도력을 제공하는 것에 있어서 모두 우리의 이전 접근의 모든 오류들을 공유할 것이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하여 동지들과 더 한 서신교환과 토론을 하게되어 행복하다. 하지만, 다른 문제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근본적인 출발점에 관하여 동의를 해야만 한다. 시리아에서의 분쟁에 대한 올바른 접근은 단순히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혁명을 위한 투쟁을 전진시킨다는 전망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출발해야만 한다. 나는 내가 이런 혹은 어떠한 분쟁에서도 한 쪽 편에 서는 것의 중요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은 혁명적 전략의 한 부분이어야만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예를 들여, 스페인내전에서 트로츠키는 분명히 공화파의 편에 섰다. 그러나 이것은 스페인혁명을 전진시키고 안내한다는 그의 전체 목적에 대하여 종속적이었다. 이러한 고려와 분리된 채 내전에서 어느 편에 서야 하는 지에 대하여 토론하는 것은 우리를 필연적으로 결국에는 혁명의 목을 치고 내전에서 패배하게 했던 인민전선이라는 입장으로 이끈다.

결론

동지들의 선전과 우리의 것들에는 토론할 가치가 있는 많은 다른 문제들이 있다. 하지만, 이 서신 자체가 충분히 길고, 이 서신은 토론을 시작해야 할 많은 것들을 제공하고 있다. 반복의 위험을 감수하고, 나는 다시한번 동지들이 혁명적 지도부의 문제라는 관점으로 우리의 선전물을 읽을 것을 강하게 권고하겠다. 이 문제에 관한 우리 관점들이 응축된 글로는 스파르타시스트 68호의 “무엇이 혁명적 지도부인가?”를 참조하기 바란다.

이전 우리의 의견교환에서, 우리는 계급적 독립성을 주장했고, 동지들은 반제국주의 투쟁을 주장했다. 이것이 어느쪽도 앞으로 나가아지 못하는 제자리에서 빙빙돌기만 하는 토론으로 귀결되게 했다. 우리의 최근 선전에서, ICL은 반제국주의를 계급 독립성 융합해왔다. 이 변증법적 정반합은 현재의 상태들로부터 시작하여 혁명적 방향으로 노동계급의 투쟁들을 안내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에 의해서만 오직 성취될 수있다. 이 출발점이 없이는 반제국주의 투쟁의 중심성을 포기하는 추상적 계급순결성이나 반제국주의 투쟁의 현재의 민족주의 지도부에 대한 굴종이라는 두 개의 함정들 중 하나에 빠졌다고 규탄받을 것이다. 이전 우리는 전자에, 동지들은 후자에 빠지고 말았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들 경향들은 동전의 양면이며,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창립자의 죽음 이래 이 운동을 병들게 해왔다. 두가지 모두에 대한 혁명적 대답이 제4 인터내셔널 창립에 핵심적이다.

우리는 동지들 조직과의 더 심화된 토론들에 참여하기를 고대한다.

공산주의자의 인사를 보내며,

Perrault

For the International Communist League


국제공산주의동맹에 보낸 편지

2024년 1월 12일

ICL 동지들에게

우리는 국제 혁명지도부 건설에 진심이다. 강령으로부터 지도부 건설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ICL 동 지들의 진지한 대응에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자유주의와의 투쟁”

“동지들의 서신에 따르면, 동지들은 우리의 대회 주요 문서인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와 노동자 권력을 위한 투쟁”을 아직까지 검토하지 않았다. 이 문서에서 우리는 소비에트 이후 시대에 국 제화와 자유주의의 패권이 어떻게 미국 제국주의의 헤게모니에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1991년 이래의 맑스주의자들의 임무가 그 정치가 제국주의 부르주아지 계 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했던 자유주의 지도부로부터 국제노동계급을 분리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었음을 주장한다.”

―ICL, KBT letter 20231221, 약간의 오타 수정, 밑줄과 기호는 BG의 것

우리의 주 관심사는 ‘제국주의-민족문제-영미국수주의’에 대한 ICL의 관점 변화였다. 그래서, 동지 의 지적처럼,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와 노동자 권력을 위한 투쟁”은 검토되지 않았다. 이번에 새로 읽게 되었다. 그것은 상당히 방대한 분량으로 소련 붕괴 이후 정세를 다방면으로 분석하는 글이다.

하지만 논문에서 100번가량 반복되는 “자유주의(liberal)”이라는 단어의 개념과 용도를 여전히 이해 하기 어렵다. 우리가 보기에, 이 단어는 실체가 불명확하다.

소련 붕괴 비극 이후 국제 노동-자본 사이에 역관계가 크게 달라졌다. 그로 인해 지배계급 ‘표정’ 즉, 통치 방식과 태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 강력한 견제자가 사라진 뒤, 세상을 다 가진 듯 의기양 양해졌고, 세계 식민지배에 더욱 호전적 태도를 보였다. 한편, 미국 등 제국주의 진영 내에서 자본 에 투항하는 노동귀족을 더욱 크게 성장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역관계 변화에 따른 지배계급의 태도 변화 그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그런데 100번이나 반복하여, 마치 새로운 이념이나 지배계급이 등장한 것처럼 그 논문은 묘사한다. ‘자유주의’라는 표 현이 적절한지 의문이다. 차라리 ‘제국주의 내 자국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노동귀족 경향’에 맞선 투 쟁이라고 묘사하는 것이 더욱 실체에 가까운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계급 대 계급의 정치와 볼셰비키그룹(BG)

“노동계급 사이에서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환상들을 부채질해 온 거대한 모순이 이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한국에 있는 맑스주의 정당은 그러한 개량주의적 환상들에 대한 유물론적 논박에 기초하여 건설되어야만 한다.”

‘계급 대 계급의 정치’는 iSt가 지켜낸 소중한 전통 가운데 하나이다. 지난 20여 년간 우리 선전물의 중심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자본주의 통치 ‘야바위놀음’과 노동계급 내 ‘자본주의의 벗’

https://bolky.jinbo.net/index.php?document_srl=14790&mid=board_FKwQ53

한반도 정세

“우리는 동지들이 우리의 문서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한국의 역 사, 한국과 미국 제국주의와의 관계, 그리고 한반도 노동계급혁명을 진척시키는 데 있어서 중심 적인 장애물들에 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관하여 알게 되는 것에 관심이 크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분석과 입장을 소개하는 두 편의 논문을 소개한다.

한반도 갈등의 본질과 노동계급의 대응

https://bolky.jinbo.net/index.php?document_srl=6374&mid=board_FKwQ53 남한

17대 대선에 대한 국제볼셰비키그룹(IBT)의 입장

https://bolky.jinbo.net/index.php?document_srl=347&mid=board_FKwQ53

근거 없는 억지 비판

“동지들의 선전이 우리 스스로가 분리했어야 했던 것과 비슷한 비혁명적이고 융통성없는 형식 주의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첫인상이다. 우리는 동지들의 조직이 특정한 문제들에 관 하여 분명한 입장들을 취하지만, 보다 폭넓은 전략적 용어들이건 혹은 보다 단기적인 즉각적 의 미에서건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한 어떠한 구체적인 행동방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인식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검토했던 기사들에 기초하여, 우리는 동지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동지들이 우리의 새로운 스파르타시스트에 있는 많은 지점들을 정확하게 관련시키고 있기는 하 지만, 스파르타시스트 최근호 전체의 중추에 해당하는 혁명적 지도부의 문제만 독특하게 빠져있 다. 예를 들면, 동지들은 영구혁명에 대한 우리의 정정의 핵심이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공산주의 지도력의 문제임을 언급하지 않는다.”

근거 없는 추상적 비판들이다. 이후에도 이와 같은 논리적이지 않은 막무가내 비판이 여러 번 반복 된다. 이와 같은 방식의 비논리는 우리와 논쟁하던 2018년 이전의 IBT, RR 등도 구사한 것이다. 스 스로를 방어할 이렇다할 논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나오는 비논리라고 우리는 판단한다. 그렇지 않 다면 근거를 대어주기 바란다. 한편 우리는 이 답신 전체에서, 동지들의 비판에 근거를 대어가며 반 박할 것이다.

“서구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전의 굴종을 거부하는 것은 단지 신식민지 세계를 위한 혁명적 트로츠키주의 전략을 재천명하는 것의 첫걸음일 뿐이었다.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은 이 전략의 중심에 있어야만 하지만, 승리하기 위해서는 민족해방과 사회해방을 저지하는 민족부르주아지 계급의 장악력을 분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것이 제국주의에 의하여 억압받는 나라들에서 혁명을 위한 핵심적인 전략적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 두 조직 사이의 다양한 지점에서의 불일치에 관한 토론에서, 항상 우리의 출발점은 그들이 사회민주주의이건 스탈린주의나 혹은 이슬람주의이건 노동계급의 현재의 잘못된 지도자 들에 맞서 노동계급의 혁명적 지도부를 위한 투쟁을 오늘 진전시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언급을 통해, ICL은 우리가 ‘제국주의에 맞선 민족해방 투쟁이기만 하면 현지 부르주 아 세력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경향’을 가진다고 색칠하고 싶은 모양이다. 이후에도 이러한 언급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계급 대 계급의 정치는 노동계급 혁명 승리를 위한 핵심 내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경우, 우 리는 이 문제를 우리 선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배치해 왔다. 이 점은 한국뿐만 아니라, 팔레스 타인, 이란, 니제르, 미얀마, 홍콩,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 카자흐스탄, 베네수엘라 등의 선전 물에서 빠지지 않는다.

팔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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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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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와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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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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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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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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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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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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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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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동지들은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임무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 들은 이란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이란혁명이 이슬람주의 반동의 승리로 귀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했는가? 이것이 전체 문제이다. 동지들이 이것에 대한 답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샤와 뮬라들 중 차악을 선택하는 것에 남겨져 있다.”

엉터리 비방이다. 이에 대한 반박과 답이 위에 소개한 우리 글에 들어있다. 조금 길게 인용한다.

“이란의 정권교체를 목표로 하는 이 침략행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거의 같은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베네수엘라 사태에 대한 것과 같다. ‘그 저항을 누가 이끄느냐와 관계없이, 이란과 세계 노동 계급은 미제의 패배와 이란의 승리를 위해 싸운다. 그러나 이란 인민의 반제국주의 의지와 이란 방 어 의지는 오직 사회주의적 전망 속에서 최대화될 수 있다. 동시에 사회주의적 전망 속에서만 이란 과 세계 인민은 제국주의 야만으로부터 근본적 해방을 꿈꿀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노동계급은 자본 주의의 수문장 현 이슬람 정권에 어떤 정치적 기대와 환상도 가질 수 없다.’

축적되던 사회불만은 1978~79년 인민봉기로 폭발했고 이로 인해 팔레비 왕조는 타도되었다. 그 승 리로 이란 인민은 사회주의로 나아갈 유력한 기회를 맞았다. 이란 노동계급은 그 봉기에서 구경꾼 이 아니었다. 석유산업을 필두로 이란 기간산업 노동자의 총파업은 팔레비 왕조 타도의 결정적 지 렛대가 되었다. 혁명 과정에서 수립된 전국파업위원회 ‘쇼라(Shuras)’는 노동자소비에트의 맹아였 다. 1917년 러시아처럼 혁명적 지침을 제공하는 지도부가 있었다면, 이란은 친제국주의 왕조 타도 에 이어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란 노동계급은 호메이니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그가 계급의 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 는 것이 필요했다. 곧 드러날 계급적 균열과 투쟁을 위해 정치적으로 단단히 준비해야 했다. 그것 은 오직 1917년 러시아의 볼셰비키와 같은 혁명전위를 건설해야만 성취될 수 있는 목표였다.

이슬람정권의

반동성 이란의 이슬람정권은 식민지 노동계급과 피억압인민의 민족해방투쟁에 업혀 등장했지만, 사회주의 혁명을 가로막고 제국주의와 타협하려는 보나파르트주의 자본가 정부이다. 노동계급을 탄압하고 정 치적 자유를 야만적으로 억누르는 폭압정권이다. 히잡 강요로 상징되는 것처럼, 여성을 봉건적으로 억압하는 신정국가이다. 우리는 이 이슬람정권이 노동계급의 이해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어떠한 정치적 기대도 하지 않는다. 지금은 제국주의 침략에 직면해 살짝 감추어져 있지 만, 더욱 근본적인 적대는 계급 사이에 있다. 1970~80년대 역사가 보여주듯이 이란의 이슬람정권 은,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정권처럼, 제국주의 학정을 거부하는 노동인민에 떠밀려 오늘 반제국주의 투쟁에 나서고 있지만, 자본주의 질서의 수장이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머지않아 투쟁을 잠식하 거나 가로막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란 노동계급은 오늘 군사적 공동전선에 참여하면서, 훗날 부르주아 체제 타도를 위한 조직적·정치적 무장에 착수해야 한다.

그 전망 실현을 위해서는, ‘계급 대 계급’의 원칙을 비타협적으로 견지하고, 반제국주의 해방투쟁의 에너지를 사회주의 혁명으로 인도하는, 연속혁명의 강령으로 체화된 레닌-트로츠키주의 혁명지도부라는 조건이 반드시 충족되어야 한다.”

“샤의 축출이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대단히 큰 타격이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들에 게 있어서 출발점은 단순히 제국주의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을 통하여 제 국주의를 패배시키는 것이다. a) 만약 우리가 맑스주의자들로서 사태들을 평가한다면, 우리는 제국주의가 타격을 받았는지 여부가 아니라 국제 노동계급의 지위가 강화되었는지 여부를 물어 야만 한다. b) 이런 기준에 따라서, 답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 명백하다. 노동계급 조직들은 분 쇄되었고, 이슬람 법이 도입되었으며, 여성과 소수민족들은 오늘날까지 잔혹한 억압에 고통받는 다. 실제로, 강력한 이란 프롤레타리아트의 목을 침으로써, 호메이니 정권은 지역전체에서 제국 주의에 대한 투쟁에 중대한 타격을 가했다.”

“동지들이 “제국주의와 싸우기”의 이름으로 호메이니의 승리의 재앙적 결과들을 경시하는 것은 동지들이 노동계급을 위한 독립적인 길이라는 이 결정적인 요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게 될 것 처럼, 이것은 동지들의 선전에서 항상적인 문제이다.”

—제국주의 식민침략에 맞서 이란을 방어하자!: 반제국주의 해방투쟁의 승리를 사회주의 혁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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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의 축출이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대단히 큰 타격이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들에 게 있어서 출발점은 단순히 제국주의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을 통하여 제 국주의를 패배시키는 것이다. a) 만약 우리가 맑스주의자들로서 사태들을 평가한다면, 우리는 제국주의가 타격을 받았는지 여부가 아니라 국제 노동계급의 지위가 강화되었는지 여부를 물어 야만 한다. b) 이런 기준에 따라서, 답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 명백하다. 노동계급 조직들은 분 쇄되었고, 이슬람 법이 도입되었으며, 여성과 소수민족들은 오늘날까지 잔혹한 억압에 고통받는 다. 실제로, 강력한 이란 프롤레타리아트의 목을 침으로써, 호메이니 정권은 지역전체에서 제국 주의에 대한 투쟁에 중대한 타격을 가했다.”

“동지들이 “제국주의와 싸우기”의 이름으로 호메이니의 승리의 재앙적 결과들을 경시하는 것은 동지들이 노동계급을 위한 독립적인 길이라는 이 결정적인 요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게 될 것 처럼, 이것은 동지들의 선전에서 항상적인 문제이다.”

과거 잘못을 반성했다고 하지만 ICL은 여전히 잘못된 관성으로 사고한다. 과거의 압력은 약해졌지 만, 현재의 압력은 강하기 때문이다. 1979년 결정적 정세에서, 참여 당시 이란 문제에 대해 중립/기권주 의 결국 제국주의에 편드는 입장을 ICL은 선택했었다. 오늘 ICL은 여전히 겉으로 그럴 듯해 보이는 초좌익적 입장으로 자신을 두둔하고 우리 즉, 레닌과 트로츠키 전술을 공격하려 든다.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은 10월 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정세를 조성했다. 그러나 7월 시기, 8월 코 르닐로프 쿠데타, 10월 봉기에 대한 올바른 전술이 없었다면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은 불가능했다.

이란에서 1979년 샤 왕조의 타도와 2월 11일 군부의 붕괴는 이란에서 어떤 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계급협조주의는 이후의 권력투쟁에서 자본가계급 즉, 이슬람주의 자들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1973년 칠레의 피노체트 쿠데타나 2013년 이집트의 쿠데타도 1917년 러시아 8월처럼 유사한 역관 계에서 발생한 사건들이다.

노동계급의 급진적 진출로 형성된 유리한 정세를 맞았지만, 노동계급 지도부의 부재나 무능력으로 그 후 권력투쟁에서 패배했다. 러시아만이 예외였다. 그 결과 진출한 노동계급은 극심한 타격을 받 으며 후퇴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계급투쟁에서 패배한 노동계급 지도부에게서 우리는 찾는다. 노 동계급 지도부의 무능력으로 권력을 차지한 자본가 계급에게 반혁명 정책의 책임을 묻을 수는 없다. 반혁명 세력이 반혁명 정책을 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의 ABC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억지 논리를 ICL 등은 여전히 구사한다. 왜냐하면 중요 정세에서 억압과 피억압 진영을 동일시하며 기권하는 자신의 기회주의를 감출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첫째, 우리가 a) 돈바스의 러시아 인민들의 자기결정권을 부정한다는 점은 사실이 아니다. 2014년 이래 돈바스의 인민들은 b)러시아 연맹으로의 편입을 원하는 쪽으로 움직여 오고 있 다. 만약 현재의 전쟁이 단순하게 돈바스의 자기결정에 관한 것이었다면, 우리는 러시아와 군사 적으로 같은편에 서는 것에 아무런 문제점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 국민투표들은 오직 이들 영토들 중에서―인구의 상당부분이 쫓겨났던―러시아가 점령한 부분들에서만 있었으며, 인민들의 감정에 대한 분명한 대변이라고 여겨질 수 없음을 부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의 민족자결은 러시아의 민족억압의 결과라고 ICL은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 므로 a)와 b)는 다른 것이라고 ICL은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레닌이 ‘민족 자결권’을 이혼의 권리에 비유한 것처럼, 민족 자결은 폭력과 불행으로부터 벗어날 ‘자 기 방어권’이기도 하다. ICL은 2008년 조지아로부터 남오세티아의 민족 독립, 2014년 크림반도의 러시아 편입 결정, 2014년 “러시아 점령 이전” 돈바스 지역 루한스크, 도네츠크의 우크라이나로부터 의 분립을 지지할 것인가 아닌가? 그리고 조지아나 우크라이나 키예프 정부가 그 민족자결을 침해 할 때 ICL은 누구 편에 설 것인가?

“문제는 현재 상황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인민들 사이의 민족적 분쟁은 어느 한쪽의 승리를 통하여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이다. 어느 쪽이 승리한다고 해도, 결과는 다른 쪽에 대한 민족적 억압일 것이다.”

민족 갈등 이면에 감추어진 제국주의 지배를 은폐하여, 피억압과 억압 세력을 섞어버리고 있다. 이 러한 논리는 자신의 제국주의에 굴종한 기회주의 특히 영미국수주의를 감추기 위한 전형적 방법이 다. 그러한 논리를 다시 반복하고 있다.

“동지들이 우리의 입장으로부터 완전히 보이지 않도록 한 것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슬로건 “총 구를 돌려라”이다. 이것은 동지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중립”이 될 것에 대한 요구가 아니고, 그들 자신의 정부들과 제국주의에 대한 혁명적 투쟁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노동자들을 단결 시키기 위한 요구이다. 그럴 때에만 오직 민족문제가 올바른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다.”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우리는 iSt 전통이 레닌의 이중적 패전주의 정책을 자주 언급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의 싸움에서 적용하는 그 혁명적 노선을 ‘제국주의와 식민지’ 갈등 에 적용하여 제국주의 편에 종종 서 왔던 것도 아주 잘 알고 있다.

다음 소개 글은 그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문서이다.

“노동계급 최악의 적”: 제국주의 투항과 중립 그리고 BT”

https://bolky.jinbo.net/index.php?document_srl=11709&mid=board_FKwQ53

더불어 이 문서에서 소개하는 「극좌일반과 특히 구제불능의 극좌에 대해서」 「중일전쟁에 대하여」 도 참고해야 한다.

“재차 말하자면, 동지들의 입장이 가지는 근본적인 문제는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에서, 한국에 서, 혹은 다른 어떠한 곳에서라도 동지들의 입장이 사회혁명을 위한 투쟁을 전진시키는 것에 어 떻게 복무하는지 동지들은 결코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지한 혁명적 조직이라면 누구라도 현재의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아래의 질문들에 답할 수 있어야만 한다: 1) 어떻게 러시아와 우크 라이나 노동자들의 단결을 벼리어낼 것인가? 2) 이 분쟁이라는 상황에서 어떻게 국제 사회주의 혁명을 전진시켜낼 것인가? 3)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에서, 그리고 세상의 나머지 국가들에서 어떻게 노동계급을 그들의 사회적 배외주의 지도부로부터 분리시켜낼 것인가?”

동지들은 이 문제들 어떤 것에 대한 적절한 답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두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거의 무례하기까지 한 무리스러운 일반화와 유치한 논리 둘째, 과연 이 동지들이 우리 우크라이나 글을 읽어보았을까하는 의문.

ICL 여러 동지들이 우리 글을 꼭 읽어보기를 바란다. 그 속에서 ICL 동지들이 우리의 진짜 오류를 찾아내고 근거 있게 비판하기를 바란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기회주의 그리고 노동계급: :‘제국주의 질서의 요동과 국제지도부의 재편’”

https://bolky.jinbo.net/index.php?document_srl=14435&mid=board_FKwQ53#%E3%84%B 49

팔레스타인

“우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한 동지들의 기사 “팔레스타인 해방과 ‘사회애국주 의’”에서 스파르타시스트 경향에 대하여 행해진 비판의 많은 부분들에 우리가 동의한다고 말하 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다. 1973년 사마라코디와의 의견교환을 지적하는 것은 동지들 입장에서 예지력이 있는 것이었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우리 인터내셔널은 우리의 이전 토론들에서 그 문 제에 대한 동지들의 주장들을 보다 진지하게 고려함으로써 분명히 얻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2013년 이후 IBT 기회주의의 뿌리를 찾기 위해 상당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리고 그 연구의 성과를 여러 문서로 남겼다. 동지의 동의와 칭찬을 듣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고통스럽기까지 했 던 그 고된 연구에 대한 약간의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의견 불일치의 진정한 본질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군사적 입장을 취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마스가 10월 7일 공세에서 시민들을 특정하여 표적으로 삼았 다는 것에 대한 것이다. 동지들은 시민들을 표적으로 삼은 것을 하나의 차이로 올바르게 확인하 지만, 그리고 나서는 이것을 일반적으로 군사적 입장을 취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소위 거부를 위한 근거들로서 잘못 제시한다. 이것은 우리의 입장을 왜곡한다. 이스라엘 시민들을 표적으로 삼기라는 실제의 차이에 집중하도록 하자.

식민지 인민이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할 때 우리는 그 저항을 누가 이끄느냐에 관계 없이, 식민지 인 민의 승리 편에 선다. 이것은 레닌과 트로츠키에게서 배운 것이고, 노동계급의 역사적 국제적 대의 와 일치하는 전술이다.

그런데 2023년 10월 10일 ICL의 팔레스타인 전쟁 관련 문서의 제목은 “하마스와 함께하면 오직 죽 음과 패배뿐!”이다.

어찌되었건 하마스는 마치 에티오피아 살라시에(1936), 중국 장제스(1937), 브라질 유사 파시스트 바 르가스(1938)처럼 제국주의에 맞선 현지 인민의 저항을 이끌고 있다. 그리고 하마스의 표적이 된 이 스라엘 시민은 그 수와 치명성에서 매우 제한적이다.

우리가 보기에, 팔레스타인 하마스는 살라시에나 장제스 또는 바르가스보다 “시민”들에게 더 해롭고 더 악해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갑자기, 동지는 “서울에 대한 핵 타격은 어떠한가?”라고 묻는다. 어떤 맥락에서 그러한 핵 타격이 있을 것 같은가?

2017년 미제의 압박에 궁지에 몰린 북한은 핵무기를 방어수단으로 언급했다. 북한이 선제적으로 핵 무기를 사용할 이유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미제가 정말로 북을 완전히 죽이기 위해 목을 조른다면, 생사의 위기에 몰린 북한이 핵무기를 워싱턴이나 뉴욕 또는 서울(세계 최대 미군기 지가 있는 평택이 목표물로 더 나아보이지만)에 날릴 수도 있을 것이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 죽을 고비에 놓인 상대는 모든 수단을 다 사용한다. 이성이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 을 어떤 명분으로 막을 수 있는가?

“그것이 이스라엘이건, 한국이건 혹은 1944년의 나찌 독일이건 간에, 우리는 특정 시기에 그들 이 얼마나 쇼비니즘으로 충만했는지와 무관하게 시민을 특정하여 표적으로 삼는 것에 반대한 다.”

그리고 누가 무고(無故)한가? 미제와 자국의 팔레스타인 침략으로 얻은 1등 시민 지위를 자랑스러워 하며,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인명과 땅과 자원을 약탈하는 정부를 지지하는 이스라엘 인민이? 군대가 현지 주민을 내쫓으면, 자체 무장하여 그 땅을 차지한 이스라엘 정착민이? 가자 지구의 포격을 언덕 위에서 구경하며 환호하는 자들이? 침략으로 얻은 땅 위에서 원래 살던 현지 주민을 조롱하며 축제 를 즐기던 자들이?

어떤 시민을 말하는가? 제국주의 침략과 초과 착취와 학살을 알면서도 동조하고, 제국주의 침략으로 건설한 왕국에 자신의 삶을 기초하고, 그에 만족하며 자국의 승리를 지지하면서, 단지 노동계급이니 침략자가 착취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1914년 유럽 사민주의자들이나 노동계급 1930년대 미 국 색트먼주의자와 그에 동조한 노동계급은 무고한가?

동지들은 누구의 눈으로 갈등을 바라보는가?

만약 동지가 팔레스타인 저항을 이끄는 지도자라면 어떤 전술을 선택할 것인가?

“하마스가 이스라엘 시민들을 표적으로 삼는 것은 팔레스타인 해방을 전진시키지 않는다. 그것 은 팔레스타인 인민들에 대한 억압에 대한 이스라엘 인민들의 지지를 더욱 공고하게 하는 것에 복무할 뿐이다. 예를 들면, 1982년 레바논 개입과는 반대로, 현재의 가자 폭격에 대한 이스라엘 에서의 인민들의 강한 지지가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a) 이스라엘이 국내적으로 단결되어 있는 한, 이스라엘은 군사적으로 패배할 수가 없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어떤 진지한 전략 도 이스라엘 내부에서의 양극화를 활용하고 심화시키는 것을 추구해야만 한다. b) 이스라엘 노 동계급은 배외주의에 깊이 충만해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 자신의 조건이 팔레스타인 억압에 의 하여 침식당한다. c) 이스라엘 노동계급은 시온주의 지배계급과 제국주의에 맞서 아랍 대중들과 함께 하는 것에 있어서 객관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또다시 겉으로만 급진적인 수사를 통해 피억압과 억압을 섞어버린다.

a)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은 패배할 수도 있다. 미군은 강력했지만 베트남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패 전했다. 제국주의 지원이 끊기면 이스라엘은 이내 고립되고 패배 가능성이 급증할 것이다. 우크라이 나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b) 어떻게 침식당하는지 설명해 보라. 그리고 베트남전이나 알제리전쟁처럼 전쟁이 패배로 기울어질 때 c)에서 말하는 “객관적인 이해관계”를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베트남전에서 5만 명의 병사들이 시체로 돌아왔을 때 미국 노동자들의 각성이 비로소 현실화되었다. 알제리 전쟁에서 패배하여 프랑스가 식민지를 잃고 있을 때 비로소 프랑스 노동계급의 각성이 고조 되었다.

동지는 “하마스와 함께하면 오직 죽음과 패배뿐!”이라고 외친다. 그러나 우리는 “제국주의와 이스라 엘의 침략에 맞선 팔레스타인 저항의 승리를!”이라고 외친다. 지금은 하마스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민족해방투쟁의 군사적 승리가 이스라엘 노동계급의 각성을 촉진하고 두 노동계급을 단결시킬 것이 다. 피억압 인민의 반제국주의 저항과 고무할 것이고, 세계적인 사회주의 투쟁을 진작시킬 것이다.

“우리의 최근 선전에서, ICL은 반제국주의를 계급 독립성과 융합해왔다. …이 출발점이 없이는 반제국주의 투쟁의 중심성을 포기하는 추상적 계급순결성이나 반제국주의 투쟁의 현재의 민족 주의 지도부에 대한 굴종이라는 두 개의 함정들 중 하나에동지들은 후자에 빠지고 빠졌다고 규탄받을 것이다. 이전 우 리는 전자에, 동지들은 후자에 빠지고 말았다고 우리는 믿는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근거 없는 억지 논리이다. 동지는 근거가 없다.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레닌과 트로츠키도 동시에 부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제국주의-민 족해방-연속혁명 문제’에서 iSt 전통은 수십 년 동안 레닌과 트로츠키 전통을 부정해왔다. 제국주의 내 노동귀족의 정서와 압력에 굴복하여 결과적으로 제국주의에 투항하는 정책을 채택해 왔다.


우리는 ICL의 2017년과 2023년 총회가 과거 잘못에 대한 반성의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믿는다. 그 리고 그 자기 반성이 제국주의 진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혁명진영으로 복귀할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우리가 ICL과의 대화에 진지하게 임하는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브라질 RR그룹과의 토론: 제국주의, 민족해방 그리고 연속혁명

https://bolky.jinbo.net/index.php?document_srl=10565&mid=board_FKwQ53

을 소개한다. 이 문서를 꼭 읽어보기 바란다. 그 글엔 ‘제국주의, 민족해방 그리고 연속혁명’이라는 주제에 대한 우리의 분석과 iSt 전통의 핵심 논리에 대한 우리의 반박이 담겨 있다. 그것은 당장 13일 IG와의 논쟁에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능하다면, 오늘 보내는 이 문서가 동지들의 13일 토론회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공산주의자의 인사에 답하며, 2024년 1월 12일 볼셰비키그룹.

공산주의자의 인사에 답하며,

2024년 1월 12일

볼셰비키그룹


볼셰비키 그룹에 보낸 편지

2024년 3월 12일

동지들 귀하

우리의 최근 서신교환들에 뒤이어, 우리는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문제들에 집중하여 3번의 긴 토론들을 가져왔다. 마지막 토론을 끝내면서, 우리 모두는 우리가 교착상태에 있다는 것에 동의했다. 다음은 우리의 상호 비동의 지점들의 성격과 향후 토론들에 대한 장애물들에 대한 우리의 관점들이다.

한국 볼셰비키그룹(BG)와 우리의 많은 차이는 모두 혁명적 지도부에 대한 우리의 서로다른 접근에서 기인한다. 우리 모두는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이 우리 관점의 중심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신식민지와 기타 민족적으로 억압받는 나라들에서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을 전진시키는 것에 대한 주요한 장애물이 이 운동의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지도부이다. 팔레스타인, 쿠르드, 그리고 돈바스에서 한국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민족주의적 강령이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을 지체시키고 배신한다. 이것이 우리가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을 사슬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노동계급에 대한 민족주의의 영향력을 분쇄하는 것에 우리의 노력의 대부분을 향하게 하는 이유이다. 우리에 따르면, 이것이 신식민지 세계의 혁명적 지도부의 임무이다.

우리가 민족해방을 위한 혁명적 길을 제공하는 것에 집중하는 반면, 동지들은 객관적 과정에 온전히 집중한다. 동지들에게는, 제국주의에 타격들을 가하는 것이 계급투쟁의 방책들과 원칙들보다 위에 있다. 그것이 팔레스타인, 우크라이나, 이란 혹은 다른 어떤 곳에 있건, 동지들은 민족주의 지도부들이 반동적이라고 선언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강령이 어떻게 반제국주의 투쟁을 억누르고 배신하는지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동지들의 근본적인 실수는 왜 계급투쟁의 원칙들이 세계제국주의의 궁극적인 패배를 위하여 뿐만아니라 현시점에서 제국주의의 야욕들에 대한 가장 큰 타격들을 가하는 것에 있어서 핵심적이라는 것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서로 다른 출발지점 그 자체가 향후 토론들을 가지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지는 않는다; 참으로, 이것은 신식민지 세계에 있는 대부분의 정당들과 그룹들에 대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차이이다. 우리로서는, 토론들을 지속하는 것에 대한 장애물은 오히려 아래의 선언에서 가장 분명하게 표현된 동지들의 공공연하게 반프롤레타리아트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입장이다:

“모든 피억압인민의 호민관이 되어,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세계 노동계급은 무고한 인민의 희 생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에 부역하는 인민이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에 맞선다면, 그들에 대한 응징은 정당한 것이라고 인정한다. 오직 침략자인 자국 정부에 맞서 피억압인민의 민족해방을 지지하며 싸우는 침략국 노동인민만이 같은 편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들만이 제국주의와 무관한 무고한 시민이라고 간주한다. 그러한 침략국 인민만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다.” [우리의 강조]

—“팔레스타인 해방과 ‘사회애국주의’,” 2021년 5월 26일.

동지들의 1월 12일자 편지와 우리의 토론들에서, BG 동지들은 부르주아지 민족주의에 대한 우리의 주장들은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우리의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제공할 할 것을 요구했다. 위의 인용이 우리가 필요한 모든 증거이다: 동지들은 그것을 방어하면서 맑스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와 한편인 나라들의 전체 “인민들”에 대한 “응징”을 정당화함으로써, 동지들은 국제주의라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분명하게 거부한다: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동지들의 입장은 서구 (그리고 모든 서구의 동맹들)의 전체 노동계급에게 사회적-배외주의 지도자들과 부르주아지 지배자들의 범죄들에 대한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맑스주의 입장은 노동계급을 그들의 사회적-배외주의적 지도자들로부터 정치적으로 분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반대로, 우리의 토론들에서 동지들은 사회적-배외주의는 제국주의 나라들의 인민들에 대한 “응징”이나 “타격들”을 가하는 것에 의해서만 패배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위의 인용과 완전히 일치한다. T 동지가 “그들 [억압 국가들의 노동자들]은 그 결과들에 직면해야만 한다”고 말했을 때, T 동지가 이 점을 가장 조잡하게 제기했다. 이 완전하게 반동적인 입장은 오직 사회적-배외주의를 강화하고, 프롤레타리아트를 분열시키고, 제국주의자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우리로서는, 위의 입장에 대한 거부가 지속적인 토론들의 전제조건이다.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억압하는 민족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자신의” 지배계급의 억압 아래에 있는 인민들의 완전한 민족적 해방을 옹호할때에 오직 단결할 수 있다는 점은 레닌주의자들에게는 기본적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억압받는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억압하는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와 완전한 단결을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이것이 레닌이 그 문제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반면 억압받는 민족들의 사회주의자들은 억압받는 민족의 노동자들과 억압하는 민족의 노동자들 사이의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또한 조직적인) 단결을 위해 특별히 투쟁하고 그 단결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러한 단결이 없이는, 독립적인 프롤레타리아트 정책과 부르주아지 계급의 모든 속임수, 배반, 그리고 협잡에 직면해 있는 다른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와의 계급연대를 고수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인데, 왜냐하면 억압받는 민족들의 부르주아지 계급은 항상 민족해방이라는 슬로건을 노동자들을 속이기 위한 수단으로 바꾸고, 국내정치에 있어서는 이들 슬로건들을 지배민족의 부르주아지 계급과의 반동적 협정들로 끝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며 (예를 들면, 유대 인민들과 우크라이나 인민들을 억압하기 위하여 반동과 조약을 맺었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폴란드 인민들), 외교정치의 영역에서는 자기 자신의 약탈자적 목적들을 성취하려는 목적을 위하여 제국주의 열강 경쟁국들 중 하나와 협정을 맺으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발칸에 있는 작은 국가들의 정책들, 등).”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의 자기결정권,” 1916년 1월-2월

동지들의 선전에는 이 전망의 가장 희미한 그림자 조차 없다. 어떻게 [그런 것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동지들이 억압하는 민족의 노동계급에 대한 “타격들”이 사회적-배외주의의 장악력을 깨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동지들이 억압하는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와의 단결에 대하여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모든 문제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지들의 접근은 객관주의적이고 교조적이다. 제국주의 나라들의 노동계급이 사회적-배외주의적 지도자들 (사실은, 이것은 모든 나라들에서의 경우이다!)을 지지하고, 이 지지는 제국주의적 착취로부터 나오는 초과이윤들에서 하나의 물질적 기초를 가진다고 동지들은 말한다. 이것으로부터 동지들은 오로지 객관적인 환경들에서의 변화(“타격들”)만이 사회적-배외주의의 사슬들을 끊을 수 있다고 결론을 짓는다. 정확한 발언으로부터 동지들은 노동귀족들에게 주어지는 제국주의적 초과이윤들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과 부르주아지 계급 사이에는 화해불가능한 갈등이 존재한다는 점이 사라지게 하는 포괄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실제로는, 세계정세가 (그들의 상층부들을 포함하는) 서구 노동계급 스스로가 자신의 제국주의 지배자들의 행위들로 인하여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재앙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을 매일 더욱 분명하게 만든다.

제국주의 나라들의 혁명가들의 임무는 제국주의 타도라는 노동계급의 근본적인 이해관계와 노동자 운동의 특정 부위들의 단기간의 이해관계만을 추구하는 타락을 통해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를 제국주의에 종속시키는 노동계급의 사회적-배외주의적 지도자들의 강령 사이의 모순을 활용하는 것이다. 동지들이 정치적 투쟁이 서구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사회적-배외주의로부터 분리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동지들은 제국주의에 “타격들”을 가하는 억압받는 나라들의 민족주의적 부르주아지 계급들이라는 바구니에 동지들의 모든 달걀들을 넣는다. 이것이 동지들이 각자 자신들의 전쟁들을 수행하는 방식에 있어서 크레클린이나 하마스와 어떠한 전략적 차이들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유이다. .

근저에서, 제2 인터내셔널의 배신으로부터 레닌이 도출했던 근본적인 결론들을 동지들은 거부한다. 대부분의 유럽 노동계급 정당들이 1차 세계대전이라는 대학살에서 그들 자신의 부르주아지 계급들의 뒤에 줄을 섰을 때, 레닌은 제국주의 나라들의 노동자들이 “응징”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결론이 아니라 노동자운동이 사회적-배외주의로부터 정치적으로 조직적으로 분리해야한다는 결론을 맺었다.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에서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를 단결시키기 위하여 그가 제3 인터내셔널을 창립했을 때, 이러한 분리가 이루어졌다. ICL이 따르는 것이 이 전망이다.

우리는 동지들이 동지들의 관점들을 재고할 것을 진심으로 희망한다. 만약 동지들이 동지들의 반동적 반국제주의적 행보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기쁘게 우리의 토론들을 재개하고 확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반제국주의라는 이름으로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와 동맹을 맺은 나라들의 전체 인민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응징”을 정당화하는 그룹과의 토론들을 지속하는 것에 있어서 어떠한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다.

동지적 인사를 드리며,

Perrault